중도(中道)를 구체적인 행동 지침으로 나눠서 말한 것이 여덟 가지 바른 길인 팔정도(八正道)’입니다. 팔정도에는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가 있습니다.

 

유불선이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 팔정도는 강도의 차이이지 3개의 교에서 모두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유교가 정명 (생활)과 정정진(노력)을 더 강조하는 편입니다.

 

우스개소리가 될 수 있겠지만 생활과윤리 과목이 정명과 정정진 중심이라 할 수 있고 윤리와 사상이 정견과 정사유 중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22 수능 윤리와 사상 4번 문제입니다. 2점짜리이니 쉬운 문제입니다.

윤사를 배우는 학생들은 무명 (無明)을 배웁니다. 밝음이 없다는 뜻인데 지혜가 없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혜라는 것은 무명에서 벗어나는 깨달음인데 무명은 ‘나’(a-tman)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하고 독립적인 실체가 없는 내가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착각과 망상이고 이런 망상에서부터 고통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무명에서 벗어나는 길은 모든 존재가 영원하지 않아서 항상 변화하며 무아를 이해하고 깨닫는 정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불교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지혜의 종교’라고 부르기도 하고 지혜를 깨달으면 이것이 밝음이 된다는 뜻에서 철학도  밝을 哲 자를 쓴 것입니다.

위 문제의 정답은 5번입니다,

 

서양에서는 고통과 자아에 대해 설파한 첫 철학자는 쇼펜하우어입니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맞서는 욕망하는 인간을 깨달으라는 것이 쇼펜하우어 니체와 그 뒤의 포스트모던 철학의 계보라 하겠습니다.

서양철학에서 인간은 흔히 이성적 존재라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부와 명예에 대한 욕망, 사랑하는 이성(異性)을 자기 것으로 삼고 싶은 욕망, 자식을 갖고 싶은 욕망, 죽고 싶지 않은 욕망, 재미에 대한 욕망 등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라 봅니다. 그래서 이성은 욕망을  통제하는 주인이 아니라 이런 욕망들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이용되는 노예에 불과한 이성이라는 것입니다.

100년도 뒤에 태어난 아드르노가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도구적 이성비판에서 이를 구체화합니다.

이 책은 배움의 목적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기도 합니다.
그보다 훨씬 앞서 쇼펜하우어는 철학이나 신학같은 학문조차도 욕망의 산물이라고 보았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멸에 대한 욕망 때문에 인간을 구원해줄 신이나  죽어서 갈 천국과 같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를 따르자면 “우리는 욕망하기 때문에 그 욕망을 감추기 위해서 공부라는 것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는 수행인 것 같지만 수행이 아닌 것입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우리 속에 감쳐진 부질없는 욕망을 다스려서는 바르게 알아차리고 바르게 보기 위한 것입니다.

공부가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통해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으면 소용없는 뻘 짓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래는 법륜스님의 팔정도 강의중 정념 정견 정사유부분 발췌입니다.

3 부분만 발췌했지만 원 뜻이 잘 전달되게 내용 수정이나 삭제는 없습니다.

 

정념과 정견이 있어야 정사유가 있지 않나라는 생각입니다.

인과관계를 예측해야 사유가 올바르다고 할 수 있는 데 직관력이 있어서 사물을 통찰력 있게 보는 것을 정견(正見)이라고 하고, 올바른 사유를 하는 것을 정사유(正思惟)라고 합니다.

 

 

정념(正念), 바르게 알아차려라

인간의 정신 작용 중에 가장 뛰어난 작용이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화가 확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화를 팍 내어버립니다. ‘너 왜 화냈니?’ 이렇게 물으면 보통 세 가지로 답합니다.

 

나도 모르게 화를 냈다’  무의식적으로 화를 냈다’  습관적으로 화를 냈다

 

공통점은 모두 몰랐다는 거예요. 이게 무지입니다. 우리의 수많은 말과 행동, 생각은 대부분 자동적으로 일어납니다. 여러분들은 내가 듣고 내가 보고 내가 말하고 내가 생각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당 부분이 자동으로 됩니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빅데이터를 갖고 분석하면 쉽게 여러분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사람마다 그 사람의 성향에 맞게 광고를 개별적으로 노출합니다. 선거에서도 저 사람은 어떤 성향이다하는 걸 파악해서 거기에 맞게 홍보를 해요. ‘저 사람은 이걸 보여주면 설득이 된다’, ‘저 사람은 이것을 좋아하고 저것은 싫어한다이런 정보를 다 모아서 맞춤 광고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자기 인생을 산다고 하지만, 실제로 여러분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욕구, 성질, 판단에 늘 끌려 다닙니다. 판단은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교육받은 대로 판단하거나 관습 등에 따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유를 들면 마치 가을바람에 휘날리는 낙엽과 같습니다. 낙엽은 자기가 막 날아가는 것 같지만, 바람이 멈추면 어느 계곡에 떨어질지 모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정신 작용 중에는 이렇게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운명이나 사주팔자, 점괘 같은 것이 백프로 맞을 수가 없는 이유도 인간에게는 알아차림이 있기 때문이에요.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대로 따라가면 이 사람은 이런 자극이 있을 때 화를 낼 수밖에 없다하게 되는데, 만약 그 사람이 자동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면 그 반응을 멈출 수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건드리면 화가 탁 난다하는 원리를 자기가 미리 알고 있으면, 화가 확 일어날 때 스스로 , 지금 자동적으로 반응하는구나하고 딱 알아차려서 그 반응을 멈출 수 있습니다.

 

알아차림만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계기입니다. 아이들에게 아무리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를 해도 안 바뀝니다. 억지로 변화를 시켜놓아도 외부의 힘이 없어지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버려요.

 

그런데 저 사람은 개과천선했다’, ‘사람이 바뀌었다이런 말을 가끔 합니다. 즉문즉설에서도 법륜 스님의 법문을 듣고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정말 스님의 법문을 듣고 인생이 바뀐다면 제 법문을 들은 여러분 모두가 바뀌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들 중에는 바뀌는 사람도 있고 안 바뀌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뀐 사람은 법문을 듣다가 내가 화가 많구나’, ‘내가 어리석었구나이렇게 알아차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자각(自覺)’이라고 해요. 이렇게 스스로 알아차릴 때만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자각이 가장 중요합니다.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는다’, ‘지혜를 증득한다이렇게 말할 때도 알아차림이 핵심입니다. 이 알아차림을 정념(正念)’이라고 합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알아차리는 기능을 강화시키는 겁니다. 무의식적으로 하는 말과 행동을 딱 알아차리면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내가 결정할 수 있어요. 수행은 어쩌면 그 초점이 모두 알아차림에 맞춰져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화가 많구나’, ‘내가 어리석구나’, ‘이러면 내가 손해지이렇게 자각을 하는 것이 변화의 출발입니다.

 

정견(正見), 바르게 보라

이렇게 바른말과 행동을 하고, 바른생활을 하고, 편안한 가운데 꾸준히 정진하고, 선정을 닦으면, 통찰력이 생깁니다. 어떤 사물을 볼 때 편견이나 감정, 욕망에 치우치지 않게 됩니다. 성질이 나거나 욕망에 확 치우치면 눈에 뵈는 게 없어지잖아요. 그래서 욕망에 눈이 어둡다’, ‘화가 나니까 눈에 뵈는 게 없다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이것이 무지예요. ‘아무것도 안 보인다’, ‘아는 게 없다이런 상태이니까요. 그럴 때 대부분 심리가 흥분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욕구, 감정, 시비에 휘말리면 안 됩니다. 술을 먹지 말라는 이유도 술을 마시면 흥분이 되고, 흥분이 되면 감정이 격해져서 싸우거나 물건을 훔치거나 성추행하거나 욕설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술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니 마음이 흥분돼서 들뜰 때까지 술을 마시면 안 돼요. 여러분들은 술을 마시고 마음이 들떠야 기분 좋다하면서 기뻐하잖아요. 그것은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마음이 차분하고 알아차림이 유지되는 가운데 집중이 되면 통찰력이 생깁니다. 통찰력이 생기면 상대편이 말하는 의도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고, 상대가 화를 내도 감정에 휩싸여 있구나하고 바로 알아차려서 상대의 말에 끌려가지 않습니다. 통찰력이 생기는 것을 지혜라고 하고, 이것이 정견(正見)’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이 곧 바르게 보는 것입니다.

 

정사유(正思惟), 바르게 생각하라

이렇게 바른 관점을 갖고 있으면 생각이 바르게 됩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원인을 모르니까 우연이니 신비니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어떤 현상이 나타났다면 반드시 원인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원인을 탐구해야 합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예측해서 알고, 작용이 있다면 반드시 거기에는 반작용이 있음을 아는 것이 정사유(正思惟)입니다.

 

지금 당장의 순간적인 욕망에 휩싸이면 이런 과보가 따르겠구나

이렇게 인과를 예측하는 것을 두고 사유가 올바르다고 하는 겁니다. 직관력이 있어서 사물을 통찰력 있게 보는 것을 정견(正見)이라고 하고, 올바른 사유를 하는 것을 정사유(正思惟)라고 합니다.

 

정견과 정사유가 있으면 말이 저절로 바르게 나오고, 행동이 저절로 바르게 됩니다. 생활방식도 저절로 바르게 됩니다. 편안한 가운데 꾸준히 노력하게 되고, 알아차림이 유지되고, 마음이 한곳에 딱 집중이 됩니다. 그러면 더욱더 통찰력이 생기고, 그 통찰력에 기반해서 사유가 더 정확해집니다.

그래서 팔정도는 지금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 되어 주고, 지금 괴로움이 없는 사람에게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게 예방하는 길이 되어 줍니다. 팔정도를 실천하면 괴로움이 안 일어나기도 하고, 괴로움이 일어나도 바로 알아차려서 그 괴로움을 가라앉힐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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