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넉넉한 편은 아닙니다.

2025학년도에 고교학점제가 시행된다면 고교 1학년이 대학을 가는 2028학년도 입시제도개편안이 2024년 2월에 확정해야 하고 그에 앞서 2023년 8월에는 그 내용을 발표해야 합니다. 국가교육위 출범때까지 모든 일을 미루고 교육부 장차관은 입시문외환을 임명했으니 새로운 대입제도를 내놓기에는  물리적 시간이 매우 촉박합니다. 불가피하게 1년 연기는 나올 것으로 보이고 그 다음이라고 해도 고교학점제의 선결조건인 내신절대평가가 시행된다면 현재의 입시3분체계 (교과전형 학종전형 수능전형)는 붕괴됩니다.

 박근혜 정부에서  2015 교육과정 개편으로 이미 학생의 과목 선택권을 넓히는 방안이 나온 것이고 고교학점제는 선택권 범위 확대에 불과합니다. 박근혜 정부에서 내신과 수능 평가 방식 개편이 있어야 하는 데 1년 일찍 정부가 소멸되고 뒤를 이은  문재인 정부는 이를 미뤘을 뿐 아니라 수능 확대라는 역방향으로 가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엉클어졌는 데 지금은 묶인 실타래를 풀어야지 누구 탓할 때가 아닌데 어찌 이리 천하태평인지 보는 사람 마음이 아슬아슬합니다.

 

아래 글은 서울대학교 김경범 교수가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에 5월 11일에 기고한 글의 발췌문입니다.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https://21erick.org/column/8131/

사진출처 : 서울 경제신문
사진출처 : 서울 경제신문

 

국가 정책에는 시급한 문제를 바로 해결하기 위한 정책도 있고, 장기적인 해결을 위해 포석을 두는 정책도 있다. 후자에만 몰입하는 정부는 당연히 없고, 전자에만 몰입한다고 “말하는” 정부도 당연히 없다.

그런데 사실 정부 정책은 실제로 전자(시급한 문제)에만 함몰되고, 그렇게 되다보니  정부마다 정책이 달라지고 국민은 피곤해진다.

 정치적 이해에 따라 후다닥 만들고 총체적 현실의 단면만 고려한 정책이다보니 누군가 다시 후다닥 바꿀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대개 교육정책은 그렇게 다루어졌다. 

교육 영역은 그때그때 마음만 먹으면 쉽게 바꿀 수 있는 단편적인 정책이 되었다.  특히 교육정책은 장기적 포석과 정책 세팅이 정말로 중요한데 시간을 필요로 하는 정책 세트는 작동이 잘 안 된다. 학교 현장에서 교사와 학생의 마음이 바뀌려면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고, 개별 정책을 조화롭게 실행하려면 교육부와 교육청도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렇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느 정부가 A 정책을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 정부는 A 정책을 버리고 B 정책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것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다음 정부는 A 정책으로 회귀했다. 그런데도 마찬가지 상황이라서 그다음 다음 정부는 C 정책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런 개별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학부모의 사교육비를 줄이기 위해 밤 10시 이후에 학원을 폐쇄했다. 그런데 사교육비가 줄어들지 않았다. 학교에서 밤 12시까지 자율학습을 하도록 허용해도 사교육비가 줄어들지 않았다. 인터넷 수능 강의를 공공기관이 운영했어도 사교육비가 줄어들지 않았다. 수능 문제를 EBS 교재에서 출제했지만, 사교육비가 줄어들지 않았다. 대학입시를 바꾸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사교육비가 줄어들까.

계속 바꾸고 이것저것 다 해봐도 사교육비가 줄어들지 않으니, 차라리 사교육비는 줄어들지 않는다고 여기고, 대책을 세우기보다 사회구조와 사람들의 인식 탓으로 돌리는 게 지금의 대책이다. 새 정부는 사교육을 줄이려고 할까. 사교육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할까. 둘 다 아닌 듯하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A 정책에 영향을 주는 B, C, D 정책들을 선별하고, B, C, D 각 정책의 부분들을 A 정책에 맞추는 “정책 세트” 혹은 정책 패키지를 디자인해야 한다. 교육정책 설계의 핵심은 새 정책을 찾는 게 아니라 정책 세팅 방식에 있다. 

주 정책과 부차적인 정책을 어떻게 선별하여 “정책 세트”를 구성할지, 정작 어려운 문제는 이것이다. 2024년 2월까지 발표할 2028학년도 대입 제도도 “정책 세트”를 구성하지 않으면 어떤 방안을 내놓더라도 비난만 받을 뿐이다.

그렇게 추진 동력이 없어진 새 정부 대입 제도는 곧바로 천덕꾸러기가 되어 시행도 하기 전에 다음 정부가 개선하려고 할 것이다.

 

장기 포석의 “정책 세트”는 권력이 큰 사람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지지율과 여론으로 결정하는 문제도 아니다. 온 국민이 교육전문가라고 주장하며 정부 스스로 면책을 주장할 문제는 더욱 아니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려야 하는 상황이 되면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결정한다. 대통령이 결정하는 게 아니고, 공론화를 거치는 것도 아니다. 이자 부담이 늘어나도 한국은행 앞에서 시위를 벌이지 않고, 금리를 올린 금통위 위원들을 감사원과 수사 기관에 고발하지 않는다. 그들의 전문성이 국민에게 신뢰받기 때문이다. 여기에 핵심이 있다. 대개 교육정책은 설계 단계부터 전문성을 신뢰받지 못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교육정책은 하나의 정부가 만드는 게 아니다. 새 정부는 국민을 향해 깃발을 들고 나를 따르라고 하지 말고, 깃발이 꽂힌 모래성에서 조심조심 모래를 덜어내듯 조금씩 다양한 정책이 현실에서 만들어지도록 포석을 놓아야 한다. 이것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이다. 

‘역사의 평가’ 혹은 ‘정치인의 무한 책임’은 이럴 때 하는 말이다. 나의 아집을 합리화하기 위함이 아니다. 지난 정부는 유치원 교육에서 진보했다. 대학입시에서는 잘하지 못했고, 초등교육과 고등교육에서는 하려고 했던 일이 없어서 이루어 놓은 일도 없다. 초등돌봄은 교육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대학의 상황은 더 나빠졌고, 이제 각자도생만이 유일한 출구가 되었다. 어느 대학도 미래를 논할 만큼 여유롭지 않다. 중등교육은 고교학점제라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새 정부에는 특별히 더 추진하려는 새로운 정책이 없어 보인다. 대다수 학부모에게는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새 정부의 교육정책은  ‘창의적 교육으로 미래인재를 키워내겠습니다’라는 큰 약속도 좋고, 세부 약속인 ‘100만 디지털 인재 양성, 모두를 인재로 양성하는 학습 혁명, 더 큰 대학 자율로 역동적 혁신 허브 구축, 국가교육책임제 강화로 교육격차 해소, 이제는 지방대학 시대’도 모두 우리 사회를 위해 필요한 일이고 실현되어야 할 일이다. 그렇지만 이 약속이 미덥지 않은 까닭은 이 약속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변변치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내용이 없고, 개별 정책의 완결성이 부족하며, 여러 정책이 서로 어깨동무할 “정책 세트”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디지털 인재 양성’ 약속은 MB정부에서 초등학교 컴퓨터교육, 영어 교육, 금융 교육, 기업가정신 교육을 다루었던 방식과 다르지 않다.

정책은 도깨비방망이가 아니다. 대통령이 디지털 인재를 양성하라고 시키면 디지털 인재가 양성되는 게 아니다. 이는 전형적인 과거 시대의 정책 접근 방식이다.

교원 연수 시간을 늘려 잡고 급조한 교재로 퍼부으면 갑자기 역량이 제고되어 아이들에게 좋은 소프트웨어 교육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MB정부의 초등 컴퓨터교육 정책을 다시 살펴보길 바란다. 큰 약속은 100m 앞에 있고, 세부 약속은 70m 앞에 있는데  우리는 한 걸음으로 1m를 가기도 버겁다. 약속이 아니라 국정과제를 달성하는 데에도 50개의 징검다리가 더 필요하다.

국정과제에 등장하는 다른 정책들 –입시 비리 조사를 전담하는 부서 설치, 마이포트폴리오 플랫폼, 온라인고교, 4대 요건(교사, 교지, 교원, 수익용 기본재산) 대학규제혁신, 「사립대학의 구조개선지원 특별법」 등-도 개별화된 단순한 이슈가 아니라 다른 정책들과 연결되어 있다.

정작 사람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갖는 것은 세가지이다.

 수시·정시 비율, 자사고·외고, 고교학점제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수시·정시 비율은 현재 수치를 유지할 듯하다. 이는 너무나 당연하다. 선거 과정에서는 모든 후보가 정시를 늘린다고 공약했지만, 이는 실현하기 어려운 공약이다. 많은 대학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정책적으로 많은 대학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을 수 없으며, 정시를 늘리면서 동시에 ‘이제는 지방대학 시대’를 말할 수도 없다. 그렇게 되면 지방대학은 현재 추정하는 시간보다 더 빠르게 소멸한다. 수시·정시 비율은 대학자율권의 핵심인데, 여기에 정부가 직접 개입하면 법적인 문제가 생긴다.

 

자사고·외고 유지는 지방교육청의 개별사안으로 만들면 될 일이다.  자사고 외고의  학생 우선선발권을 회복시켜주고 현재의 대입 체제를 유지한다면 ‘모두를 인재로 양성하는 학습 혁명’이라는 새 정부의 약속은 거짓이 되고 만다. 새 정부 출범의 원동력이었던 학생 선발의 공정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상황이다. 이 이슈 자체를 지역의 개별 교육청 사안으로 만들면 될 일이지 굳이 정부가 떠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지 않을까.

 

고교학점제는 이미 작년 2월과 11월에 발표한 일정대로 시행된다. 

고교학점제를 하지 않으면, 이보다 더 나은 대안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대안은 아직 없다. 학교 현장이 시행 시기를 연기해 달라고 했으나, 학교 현장의 문제를 ‘온라인 고교’로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새 교육과정 시행을 미루면 새 정부의 중등교육 정책은 지난 정부의 정책에서 사실상 달라진 게 없으며, 대입 개편도 미뤄지게 되어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정부가 된다. 다만 고교학점제의 내용은 바뀔 수 있다. 아마도 지난 정부에서 학교 내 새로운 과목 개설, 공동교육과정, 지역연계교육과정, 대학연계교육과정, 온라인교육과정, 연구학교, 시범학교, 상담 연수 등 너무 많은 사업을 추진하여 학교 현장에 부담을 주었으니, 그 사업들을 ‘온라인 고교’ 사업 + 에듀테크 도입으로 단순하게 갈무리하지 않을까.

 따라서 고등학교 현장에서 크게 우려하거나 혼란이 생기는 변화는 없을 듯하다. 오히려 7월에 출범하는 국가교육위원회의 구성, 교육부와 국가교육위원회가 역할 조정, 새 교육과정 심의, 새로운 대입 제도 추진 주체 결정 등 새로운 이슈가 정부 내에서 제기되므로 학교 현장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발표들은 당분간 없을 듯하다.

 

정부 교육정책의 초점은 ‘모두를 인재로 양성하는 학습 혁명’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미래가 걸린 새 정부의 시대적 과제이다. 그런데 이 과제는 조용히 진행되지 않는다. 사회적 논란이 없으면 과거 체제는 발전하지도 진보하지도 않고 그대로 정체되어 모순만 쌓여간다. 사회적 논란이 되는 이슈를 선택하여 공론장에 올리는 게 정부의 역할이다. 정부가 그 역할을 하지 않으면 사회는 조용하지만 퇴보한다. 우리 사회에 창의적인 인재가 필요하다는 새 정부의 진정성을 보고 싶다. “위에서 창의적 인재가 필요하다고 하시니 이제부터 교육청은 창의적 인재를 키우세요.” 이렇게 교육부가 공문을 보내면, 이를 받은 교육청은 일선 학교에 공문을 전달한다. 조금도 시끄럽지 않다. 창의적 인재 육성은 답이 아니라, 답을 찾기 위한 시작이다.

새 정부가 시끄럽게 답을 찾기 시작할 때 그 진정성이 국민의 마음에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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