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은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그런데 독립운동사나 일제의 탄압이 내용이 방대하고 영화로 만드는 과정에서 잘못된 시각이 정립되면 그것으로 대중들이 믿는 사실이 나오는 문제점이 다소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제강점기를 생각보다 살만한 시대로 재조명하고, 독립운동을 생각보다 별 볼일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이비학자들 그리고 여기에 편승한  대중적 허무주의가 많이 퍼져있으나(미국이 핵 날려서 독립한 것이지 독립운동은 아무것도 안 했다), 가장 큰 오해라고 할 수 있다.

장 자크 루소는 인간은 자연적으로 태어났지만 그것은 그저 인간일 뿐이며(Natio), 인간은 여러 가지 과정을 통해 국민(Nation)으로 "만들어진다"라고 주장했다. 

국민주의(Nationalisme)는 통치자들의 통치 수단이 아니며, 그것은 국민들에게 승인되고, 체험된 각인으로서 다가와야 비로소 국민들에게 습득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국기에 대한 경례나 애국가와 같은 "체험"을 통해 한국의 국민주의는 그 사상적 기반을 이루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국민에게 있어, 국민 국가를 "형성" 하도록 전 국민이 "승인" 하고 "체험" 하여 "각인"된 가장 주된 역사적 사건이 무엇이었는가? 바로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이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말하기를, 동아시아에는 국가의 역사는 있지만 국민의 역사는 없었다. 언제나 권력자 간 전쟁과 암투가 반복되었고 민란과 같은 개별적인 봉기는 여러 차례 있었으나 이는 전국적인 차원으로 번지지 못했다. 결국 각 고을에 사는 농민들의 이익을 위한 작은 공동체만을 위한 움직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경향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으로 홍경래의 난과 동학 농민 운동이었지만 이 두 사건 역시 각각 지역주의와 자국 우월주의적 종교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에 그 한계가 결국 드러나게 되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독립운동이라고 불리는 전 국민적인 체험을 겪게 된다. 그 이전까지는 공동체나 특정 가치에 묶여있던 봉기가, 비로소 "국가를 위한다"라는 거대한 대의를 위하게 되었고 일개 고을이나 지방에서 그쳤던 규모 역시 전 국민과 전 계층으로 퍼졌다. 이를 통해 독립운동은 이전까지 왕이 보호하는 지역 단위의 공동체라는 한국의 수동적이고 전통적인 국가관을, 모든 계층의 국민들이 움직여 국가를 되찾고 지킨다는 능동적이며 국민 국가적인 국가관으로 전환시켰으며, 공통된 체험인 3.1 운동이나 무장봉기, 총파업 등을 통해 국민들에게 이를 각인시켰다.

​이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 민주화 운동이었으며 따라서 두 사건은 단순히 불의를 위해 일어난 사건 정도의 의의를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점은 우리 정부와 교과서가 축소하여 가르치고 있는 부분이다. 요약해 말하자면, 독립운동은 단순히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운 투쟁의 성격을 벗어난 역사인 것이다. 그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 자체를 형성한 일종의 혁명이었다.

 

그래서 유관순의 독립운동과 윤봉길의 의거는 성격이 다르다고 평가해야 된다.

독립운동가의 역할에서 유관순의 역할이 과대평가되고 윤봉길이 덜 조명받는 차원이 있겠지만 사건자체(아우내 만세운동과 훙커우공원 투탄)로 놓고보면 유관순과 윤봉길의 운동은 의미해석이 다른 차원이 있다.

앞서 이야기처럼 아우내장터의 만세운동은 능동적인 국민관을 갖게 한 전환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오해가 윤봉길의  의거에 대해  장제스가 "100만 대군이 못한 일을 한 사내가 해냈다"라며 격찬을 했다는 말이다. 일단 장제스가 그런 말을 했다는 기록 자체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이는 역사 왜곡이다. 오히려 장제스는 "과연 일본이 윤봉길의 의거가 일본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까? 일본이 더 큰 원한을 가지고 조선을 괴롭히지 않을까 걱정된다"라고 일기장에 적었다고 한다.

게다가 장제스 연구가 이어지면서 과연 국민당 정부와 장제스가 윤봉길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는지조차 의문이 제기된다. 윤봉길 의거 1년 후 김구와 장제스가 면담을 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여기서 장제스가 윤봉길의 의거에 감동을 받았다는 분위기를 전혀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장제스는 "천황을 죽이면 또 다른 대장이 나타나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라며 윤봉길뿐만 아니라 이봉창의 의거 역시 비판하였다. 그는 윤봉길의 의거로 인해 일본이 큰 복수심을 가지고 중국을 더욱 맹렬히 공격할 것을 우려하였다.

그래서  순수하게 장제스가 의거에 감명을 받아 우리 독립군을 지원했다고 보는 것은 위험한 시각이다. 장제스는 철저한 중화주의자였으며 몽골, 티베트, 연해주 등 과거 중국이 지배한 지역은 모두 중국의 땅이라고 주장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과거 청나라의 속국 비슷한 지위에 있던 조선도 중국의 영향력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단지 중국과 조선의 지위를 복구시키기 위해 독립군을 지원한 것일 뿐이었다.

 

유관순만 있었던 그 곳 아우내 장터 시위

근래에 들어 가장 과대평가된 독립운동가로 재시되는 인물이 유관순이다.

과연 유관순이 알려진 대로 병천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을 주도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점이 많다. 현대의 학자들은 유관순보다는 조인원을 더 주목하고 있다.

조인원은 한양 조씨 가문의 양반으로 시위를 주도적으로 기획하였고, 4월 1일 3천여 명의 군중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공판 과정에 있어서도 아우내 장터 만세 시위로 끌려온 사람들은 모두 조인원의 주도로 아우내 장터 시위가 열렸다고 진술하였다. 유관순이 주도한 사람 중 한 명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지금으로 치면 유관순은 집행위원이고 조인원은 집행위원장이었던 셈이다. 또한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남존여비가 심했던 당대 식민지 조선 내에서 나이 지긋이 먹은 양반이 10대 여성에 비해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시위를 더 쉽게 주도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유추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조인원은 하필 아들이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후보로 나선 유명한 정치가 조병옥이었기에 아들의 유명세에 묻힌데다가, 유교 신자였던 조인원에 비해 유관순은 기독교 신자였으므로 후세 기독교 계열에서 조인원에 비해 유관순을 더 띄워준 것은 당연하였다. 서사상으로도 신여성이라고 할 수 있는 유관순이 조선 시대, 즉 구세대를 대표하는 양반에 비해 더욱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조차 없다.

아래는 동아일보의 보도내용입니다.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는 유관순 열사의 활약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독립운동사의 대표적인 만세운동으로 꼽히는 이유는 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열정적으로 참여한 수많은 촌부(村夫) 촌부(村婦)들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아우내장터의 영웅들’이라고 부를 만하다.

실제로 유관순 열사의 고향인 동면 지렁이골의 만세운동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되었는지는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조병호(1903~1973)의 증언을 통해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신동아 1965년 3월호·조병호 ‘유관순과 병천 장날’) 조병호의 부친으로 동면의 어른이었던 조인원(1865~1931)이 아우내장터에서 각각 천안, 수신, 진천과 통하는 세 갈래 길목의 책임자를 지명했고, 열여섯 살 조병호와 스물한 살 조만형, 스물일곱 살 박봉래가 각각 책임을 맡았다. 밤에는 마을의 남녀노소가 예배당에 모여 태극기를 그리면서 교제를 나눴다. 지도자급 인사였던 이백하(1899~1985)와 조인원은 음력 2월 그믐날엔 천안 길목과 진천 고갯마루, 수신면 산마루에 횃불을 놓아 다음 날의 거사를 알리도록 계획했다. 아우내장터의 만세운동을 예고하는 ‘봉화제’였다. “병천장터에 주둔해 있던 야마모토 등 네 놈의 일본 헌병은 전혀 이 움직임을 알지 못한 듯했다”라고 조병호가 회고할 만큼 시위대의 계획은 은밀하게 진행됐다. 그리고 마침내 “가슴이 두근거리는 가운데 날이 밝아왔다”.

● “망국의 한과 항일의 염이 있을 것이니”

오롯이 동면 사람들만 만세운동에 참여한 건 아니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날을 앞두고 인근 각 면의 주민들이 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있었다. 수신면 김교선(1892~1970)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스물일곱 살 농군이었던 그는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3월 말이 돼서야 마을 친구인 이순구(1892~1950)에게서 전해 들었다. 수신면민을 동원해서 전국에서 일어나는 항일운동에 호응해야겠다고 이순구와 뜻을 모은 김교선은 마을 유지인 박영학(1878~1920)을 찾아가 상의한 뒤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한다. 그는 마음 맞는 동지 몇을 모아 마을 뒷산에 횃불을 올려놓고 무턱대고 독립만세를 불렀다.(김남석 등 지음·‘충남의 독립운동가’)


아우내장터의 만세운동 현장은 그해 경성복심법원과 공주지방법원 판결문에 생생히 기록돼 있다. 김교선 이백하 이순구 조병호 조만형 등이 피고로 적힌 판결문이다. 유관순도 피고들 중 한 명이었다. ‘독립운동사’에도 재현돼 있는 이 만세운동의 장면은 극적인 영화(映畵)를 보는 것 같다.

일본 헌병의 발포로 사상자가 나오자 시위대는 주재소로 몰려간다. 조인원이 저고리를 벗어버리고 주재소장의 총부리를 잡아 제치고, 유중무(유관순의 숙부)는 두루마기 끈을 풀어 제치고 헌병에게 항의하다가, 이를 만류하는 헌병 보조원 맹성호에게 “너는 보조원을 몇십 년 하겠느냐”고 소리 지른다. 시위대 중 한 명인 스물네 살 김용이도 주재소 보조원 정춘영에게 “조선 사람이면서 무엇 때문에 왜놈의 헌병 보조원을 하느냐”라면서 주전자를 던진다. 김교선은 주재소 뒤쪽으로 돌아가 전화선을 끊는다. 천안 헌병본대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런 노력에도 본대 헌병 20여 명이 트럭을 타고 아우내장터로 들이닥쳤다. 맨주먹의 장꾼들은 흩어졌고, 일본 헌병들의 총칼에 쓰러진 피투성이 시체 30여 구가 장바닥에 늘어졌다. 주도자들은 대부분 붙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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