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영화계에서 사용하는  "전쟁 서사"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되었다.

하나는 임진왜란이고 하나는 항일 독립 전쟁이다. 둘 다 일본에 대항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해 보이지만, 사실 둘은 완전히 다른 부분에 있어 국가와 국민의 존재감을 고취시키고 있으며 이런 차이점은 우리가 이순신에 왜 열광하는지에 하나의 열쇠가 된다.

일본과의 싸움을 다루는 두 서사의 차이점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이라는 두 국가의 대등한 싸움이었지만 독립전쟁은 억압자인 일본 정부와 피억압자인 조선인이라는 주종 관계에 있는 혁명의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독립전쟁은 영국의 나치 격퇴라기보다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나치 격퇴 - 즉 레지스탕시알리슴(Resistancialisme)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임진왜란은 국가체간의 싸움이었다면 독립전쟁은 국가와 개인의 싸움이었다. 그래서 두 전쟁이 요구하는 서사가 서로 다르다.

예를 들자면 <암살>을 보자. <암살>은 <명량>과 거의 같은 시기에 개봉되어 똑같이 국수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사실 <암살>은 <명량>과 같은 눈에 띄는 1인 영웅이 안 보인다는 점에서 <명량>과 차별화되고 있다. 그보다는 잊힌 독립운동가라는 주제를 조명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이 우리 주변에 있는 일반인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다른 영화들도 같다. <밀정>은 어떠한가? 김구같이 우리가 아는 1인 영웅들은 조연으로 밀려나며, 그보다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반인" 운동가들이 강조된다. 개인적으로는 싫어하는 영화이긴 하다만 <말모이> 같은 영화가 독립운동 서사의 핵심을 정말 잘 짚고 있는데,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실존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으며, 심지어 주인공은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독립에는 관심이 없는 일반적인 소시민으로 나온다. 이런 "소시민이 각성해 독립운동에 투신한다"라는 서사 구도는 <택시운전사> <1987> 같은 민주화운동 서사시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반면에 <명량>이나, 이번에 개봉한 <한산> 같은 영화들이 다루는 임진란은 국가 대 개인의 싸움이 아닌 국가 대 국가의 싸움이기 때문에 그런 프레임이 굳이 필요가 없다. 특히나 투쟁의 방식이 여러가지일 수 있었던 독립운동 시기와 달리 임진왜란은 문자 그대로의 전쟁이었기에 일반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굉장히 제한되었고, 그래서 소시민들이 참여한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의병 운동조차 곽재우나 사명 대사 같은 극소수 개인만이 주목을 받았다. 미디어를 비교해 보면 이런 차이가 확연한데, 우리는 독립운동을 다룬 영화와 달리 임진왜란을 다룬 영화에서 일반 백성(국민)이하는 역할이 더 적고, 반대로 장수와 전법이 더 많이 등장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보다 고전적이고, 그리스 로마식인, 그러니까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한니발 바르카, 혹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서 볼 수 있는 모습에 가까운 영웅 서사라고 하겠다.

고전적 영웅주의와 현대적 영웅주의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의 <영웅 숭배론>으로 설명해 보겠다. 토머스 칼라일이 주창한 영웅주의(Heroism)은 고전적인 영웅주의와는 약간 결을 달리하는데, 그의 말을 통해 요약하자면 "영웅은 그 존재뿐만 아니라 그것을 요구하는 시대도 필요하다"라는 점에서 이순신 같은 영웅주의와는 차이가 있다. 토머스 칼라일이 생각한 "영웅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영웅은 단순히 잘 싸우는 것뿐만 아니라, 개인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했고, 영웅을 알아보는 개인들도 있어야 했다. 수많은 작은 영웅이 큰 영웅을 탄생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토머스 칼라일과, 현대 영웅주의에서 말하는 영웅은 이순신이라기보다는 수많은 잊힌 독립운동가에 가깝다.

본론으로 돌아와, 왜 <명량>보다 <한산>이 명작이냐 하면 이런 이유 때문이다. 명량에서는 유독 백성들과, 이순신의 전우들, 그리고 이순신 개인의 서사가 부각되는 면이 있는데 이건 현대적인 영웅주의에 부합하는 면이 있기에 임진란을 다룰 때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측면이 있었고 그래서 관객들이 보기에 뭔가 어색한 부분이 생겨나게 된다. 대중들이 바라는 이순신의 모습과 영화가 그려내는 이순신의 모습이 어긋났던 게 <명량>이었다면, 그 모습이 일치했던 것이 <한산>이었다. <명량>에서 이순신은 이순신이라기보다는 독립운동가형 영웅으로 그려졌다. 반면 <한산>에서 이순신은 토머스 칼라일이 이야기한 헤로이즘 이전의 고전적 그리스 로마(카이사르) 식 영웅으로 잘 그려져 있는 모습을 보인다. 개인의 서사와 백성의 서사는 빼고, 그보다는 개인이 어떠한 방식으로 상대를 격파했는지를 보여줌에 따라, 관객이 요구하는 이순신의 모습에 더 잘 부합하게 되었다.

영화 한산 화면 캡쳐
영화 한산 화면 캡쳐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역할: 이순신의 참모습

<한산>에서 이 모습이 잘 반영된 점이 변요한이 분한 와키자카 야스하루이다. <명량>에서 와키자카의 모습이 참 형편없었는데 반해 <한산>에서는 이순신의 호적수라는 모습이 잘 그려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실제 역사에서 와키자카의 모습은 <명량> 쪽이 훨씬 가깝다는 점이다. 와키자카는 대단한 장수도 아니었고, 중소 다이묘 쪽에 속했던 고로 이순신의 상대가 안 되는 건 당연했다. 오히려 임진란에서 싸운 명문가들은 대부분 축소되어 나타나서 와키자카보다 덜하다는 인상을 준다.

이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호적수의 존재 자체가 이순신이 독립운동가와는 다른 형태의 민족적 영웅이라는 것에 대한 증거라는 것이다. 아직도 이런 고전적인 영웅주의 서사시를 많이 따르고 있는 일본의 미디어물을 보면 호적수의 존재는 상당히 중요하게 그려진다.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각자를 인정하는 훌륭한 장수로서 그려지지 않는가. 이렇게 함으로서 1인 영웅은 강한 적을 무찌른 강자로서 그려지며, 영웅에 대한 비범함이 더욱 강조된다.

반면 독립운동 서사시는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다. 강자를 내세워서 우리가 강하다고 자부심을 가지는 게 아니라, 우리는 약자였지만 강자를 상대로 싸워서 이겼다는 점에서 자부심이 비롯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얼마나 약했는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일제의 악독함을 배로 부풀려 왜곡하곤 한다. 물론 와키자카가 실제 역사보다 더 강하게 그려진다는 점에 있어 비슷한 게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일제가 더 강하게 그려지는 것과, 와키자카가 더 강하게 그려지는 것에는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 일제는 탄압의 주체로서 "부정의"를 대표하지만 와키자카는 그저 싸움의 적수로서 "전투의 상대"를 대표할 뿐이다. 물론, <한산>의 일부 장면에서 와키자카가 부정의의 측에 있는 것처럼 그려지긴 하나 그것은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화의 서사에 비하면 한없이 약하다.

한마디로, 일제강점기의 서사시는 부정의와 정의의 대결,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대결, 강자와 약자의 대결이라는 특징을 가진다면, 임진왜란의 서사시는 국가와 국가의 대결, 강자와 강자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한데 <명량>은 임진란을 그림에 있어 독립운동의 서사시를 가져왔다. 이순신 측을 불쌍하게 만들고, 백성의 역할을 강화했다. 이런 모습은 토머스 칼라일이 정의 내린 현대 영웅에 가깝지 다케다 신겐이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서 볼 수 있는 무사의 모습이 아니다.

반면 <한산>은 임진란이 가지는 특수성을 반영해서 그를 바탕으로 이순신을 그려냈고, 그래서 이순신이 현실의 모습과 더 가까움과 동시에 일제강점기의 영웅과는 다른 또 다른 영웅을 보여줘 관객이 열광한 것이다.

이순신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시대가 영웅을 만들기도 하지만 영웅이 시대를 만들기도 한다. 독립운동은 시대가 영웅을 만든 것이었지만 임진왜란은 영웅이 시대를 만든 것에 가깝다. 현대에 들어서 후자가 구식인 것으로 치부되곤 하고, 실제 현실에서 후자가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의 논리로서 사용되며 정치에서의 영웅주의가 퇴색되는 부분이 있으나, 미디어에서까지 그런 논리를 끌어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국민들이 단결해 국가를 구한다는 서사는 멋지지만, 그것은 개인의 집합일 뿐 개인 그 자체는 되지 못한다. 거대한 흐름이 중시되고, 정작 개인의 서사는 잊히는 작금 미디어에서 다루는 민주화운동 및 독립운동의 "개인 서사"에 대해 나는 약간 부정적이다. <1987>은 최고의 민주화운동 영화였지만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개인을 심층적으로 다루는 데에는 실패했다. 단지 여러 개인이 드문드문 다뤄질 뿐이다.

그러한 점에 있어 영웅주의가 아직은 미디어에 있어 필요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한다. 개인을 조명하면서,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면서 어떤 결과에 이르렀는지를 쭉 써 내려가는 것은 그 자체로 굉장히 좋은 서사가 된다. 따지고 보면 우리 인간들은 언제나 그런 서사에 열광하지 않았는가. 길가메시, 싯다르타, 카이사르, 사카모토 료마, 안중근은 모두 다른 인물이지만 사람들이 그들에게 열광하는 건 그만큼 그들의 인생이 흥미롭고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영웅들의 이야기는 영웅들이 결국 우리 인간들과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스스로의 노력으로 그런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는 점에 있어 인간들의 도덕성과 종교관, 그리고 인생철학 전반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영웅주의가 정치적으로 퇴색되었더라도 미디어물, 그리고 종교와 철학의 분야에 있어 고전적 영웅주의는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또 조명 받아야 할 필요가 존재한다. <한산>과 이순신은 이런 영웅주의의 개인적 측면을 잘 보여주는 존재이다.

부록 -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임란의 일본 명장들에 대해

​이 부분은 중요한 부분도 아니고 부연 설명과 독자에 대한 배려 없이 그냥 내 마음대로 쓴 글이므로 일본사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읽지 않아도 된다.

와키자카 야스하루, 이 분에 대해 할 말이 참 많다. 일단 이 사람은 잘 알려진대로 풍신핵관(도요토미 히데요시 핵심 관계자)으로 요약할 수 있는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중 한명인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중에서 와키자카는 약간 이레귤러다. 원래 이 사람은 도쿠가와 쪽의 사람이었고 단지 이시다 미츠나리가 무리하게 잡아놔서 친도요토미 쪽으로 보여졌을 뿐이다. 게다가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이라고 하여 다 유명한것도 아니다. 대중적으로 알려진건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키, 후쿠시마 마사노리 뿐이고 나머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와키자카의 영지가 총 3만석 정도 되는데 이는 정말 형편 없는 중소다이묘 정도의 지위다. 당시 시마즈 가문과 다테 가문이 각각 72만석, 62만석이었고, 이름을 알만한 명문가 중에서는 호소카와 가문이 54만석, 구로다 가문이 47만석, 모리 가문이 36만석, 아이즈 마츠다이라 가문이 28만석이었다. 하다못해 후쿠사마가 24만석, 고니시가 20만석, 가토가 17만석 정도 되었다. 3만석이면 역사책의 한 구절로도 언급되기 힘든 가난한 영주이다.

그렇다고 후쿠시마 마사노리처럼 전과가 뛰어나다면 모르겠는데 와키자카는 실제 전과가 처참하다못해 눈물이 난다. 한산도 대첩이 대패로 끝나며 와키자카는 쾌속선을 타고 도망쳤는데, 판옥선에게 따라잡혀 배가 박살이 나고 남해의 한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다. 와키자카는 두려움에 떨며 13일간 미역을 캐먹으며 버티다가 조각배를 타고 판옥선의 포화 세례를 받아가며 간신히 도주했다. 아직도 와키자카 가문은 이 사건을 가문 최악의 치욕으로 여겨 한산 대첩이 일어난 날이면 미역을 먹는다고 한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세키가하라 전투 때인데, 와키자카는 그래도 동군 쪽의 편을 들어서 다른 칠본창과는 달리 에도 막부 시기에도 근근히 먹고 산 것 같다. 애초에 도쿠가와 쪽 인사이기도 했으므로, 후쿠시마 가문처럼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지키겠다며 날뛰다가 몰락할 일도 없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에는 희대의 졸장 이시다 미츠나리의 삽질로 인해 서군을 배신한 가문이 한두가문이 아니었으므로 이 역시 지나가다 언급되는 수준이다.

심지어 일본 내에서는 자신의 후손보다도 인지도에서 밀린다. 와키자카 가문은 아코 번 옆에 있는 타츠노 번을 다스렸는데, 일본 문화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아코 번이 그 유명한 추신구라 사건의 배경이었다는 점을 알 것이다. 아코 번에서 대소동이 난 후 후속 처리를 맡은 것이 와키자카의 증손자여서 일본에서는 와키자카라고 하면 간신히 추신구라를 떠올리는 사람은 있어도 임란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와키자카에 비해 흥미로운 인물들이 임란에 많이 참전했다. 예를 들자면 행주 대첩은 권율이 부각받지만 상대편을 이끈 이시다 미츠나리는 정말 유명한 인물이다. 도쿠가와의 거병에 맞서 서군을 지휘한 사람이 아닌가. 사실 행주 대첩에서 이시다 미츠나리의 한계가 다 드러났고 이 한계는 세키가하라 전투로 이어져 서군이 참패해버리고 만다.

진주성 전투의 호소카와 타다오키도 흥미로운 사람인데, 이 역시 김시민이 유명하지만 타다오키도 눈여겨볼만하다. 무엇보다 타다오키의 부인인 가라샤가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녀는 일본 최초의 키리시탄중 한명이었고 이후 가라샤가 미츠나리 측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 때문에 타다오키는 바로 서군에 붙어버린다. 집안 자체도 대단한 명문가이고, 일본 내에서는 거의 쇼군 다음가는 가문이다. 1990년대에는 총리도 배출했다.

​진주성 전투에 참여한 또다른 명장으로 다테 마사무네도 있는데 호소카와 가문에 비해서는 인지도가 떨어지지만 어쨌든 다테 가문도 도요토미 정권에서 거의 2인자의 역할을 했던 명문가이다. 그리고 과거에는 어쩔지 모르겠으나 임진란 당시에는 다테 마사무네가 호소카와 타다오키보다는 더 지위가 높았다. 다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공적은 아무래도 그의 보신주의적인 성향 때문에 약간 떨어지지 않나 싶다.

노량 해전의 시마즈 요시히로도 재밌다. 이 가문이 다스린 사쓰마 번은 익히 알려진대로 삿초동맹을 통해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고 이들이 바로 일본 해군과 해상자위대의 시조이다. 시마즈 요시히로 개인도 대단히 흥미롭다. 요시히로는 거대 영주 치고는 굉장히 적은 병사만을 출병했는데, 이는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의 활약으로 군인들이 너무 많이 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시다 미츠나리는 참으로 그답게도 이를 시마즈 가문이 자신을 따르지 않는 증거라고 생각해, 전투 베테랑인 시마즈 가문의 충고를 전부 무시하고 오직 세키가하라에서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고 고집해 자신의 명줄을 단축시켜버렸다. 만약 노량해전에서 시마즈 가문이 덜 패배했다면 역사가 바뀔 수도 있었다.

이런 점들을 임진왜란과 잘 묶는다면 좋은 서사가 탄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센코쿠 시대와 아츠지 모모야마 시대에 대한 인지도가 아무래도 떨어지고 레전드급인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도 인지도가 처참하기에 미디어물에서 일본 측의 명장들을 잘 다루지 않는 점은 이해가 된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일본사에 대해 관심이 지대한 오타쿠로서, <한산>에서 일본 측의 복잡한 상황이 많이 생략된건 아쉽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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