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개드리는 주영하 박사는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했습니다. 박사학위는 특이하게  중국 중앙민족대학교 민족학·사회학 대학원에서 민족학(문화인류학) 으로 받았습니다. (1998년)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민속학 담당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그동안 주교수가 쓴 책은 《음식전쟁 문화전쟁》, 《차폰 잔폰 짬뽕》, 《음식 인문학》, 《식탁 위의 한국사》, 《장수한 영조의 식생활》, 《밥상을 차리다》,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 《조선의 미식가들》, 《백년식사》, 《음식을 공부합니다》, 《한국인, 무엇을 먹고 살았나》(공저), 《조선 지식인이 읽은 요리책》(공저), 《음식 구술사》(공저) 등이고  《중국 음식 문화사》를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이번 9월에 나온 《그림으로 맛보는 조선음식사》는 조선의 미식가들 조선 지식인이 읽은 요리책 등 조선 음식사 책의 시리즈물이라 하겠습니다.

 저자만의 독보적인 음식문화사 읽기가 여러 책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숙설소(熟設所)’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  남성 요리사 일색인 그림의 묘사가 이상하다고 여길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대부분의 사극에서는 여성 나인들이 음식을 만들지 않았던가? …… 이것은 전근대 왕실의 벼슬 체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근대 사람들은 남성이 공식적인 일을, 여성은 비공식적인 일을 맡아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궁중의 공식적인 직책 대부분은 남성들 차지였으며, 여성들은 단지 왕을 보조하는 일을 맡았을 뿐이다. 많은 사람이 조선시대 요리사 하면 대장금 같은 여성 나인만을 떠올리곤 한다. 〈선묘조제재경수연도〉에서 보이듯이 조선시대 왕실의 핵심 요리사는 남성이었다. ‘요리=여성’이라는 인식이 오늘날의 편견일 수 있다는 점을 이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 3장 ‘〈선묘조제재경수연도〉 (46~51쪽)

순창고추장은 순창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주영하 박사가 밝혔습니다.

영조 임금이 즐겨 먹었던 순창 고추장은 순창에서 만든 고추장이 아니라, 한양에 사는 순창 조씨인 조종부(趙宗溥) 집에서 만든 고추장이었습니다. 

11년전 주영하의 음식 100년을 경향신문에서 연재물로 기고했습니다.

https://www.khan.co.kr/series/articles/ac094

1화 가장 오래된 외식업 국밥집 중 내용 일부입니다.

18세기 중엽이 되면 조선사회에서는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곳곳에 5일마다 열리는 장시(場市)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특히 서울 종로 근처에는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전문적으로 공급하는 육의전이 있었다. 그 전에 비해 사람들이 서울로 많이 모여들었고, 그들을 위한 식당들이 지금의 종로와 북촌 일대에서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소의 피를 뜨거운 물에 넣고 응고시킨 선지로 국을 만들어 판매하는 식당이 종로 피맛골 근처에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선짓국이다. 조선시대 성균관은 지금의 대학과 비슷했지만, 공자를 비롯한 성리학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계절마다 제사를 올린 점이 달랐다. 이곳에서 제물에 사용할 소나 돼지를 잡는 사람을 반인(泮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제사를 지내고 남은 소의 피나 내장을 식당 주인들에게 팔았고, 그들은 이것을 무쇠솥에 고아서 각종 국밥을 만들어 팔았다.

탕반과 비슷한 음식으로 온반(溫飯)도 있다. 평안도 사람들은 닭고기나 꿩고기로 만든 뜨거운 국물을 밥에 부어 먹는 음식을 온반이라 불렀다. 당연히 닭고기나 꿩고기의 살코기가 밥 위에 올라간다. 온반도 알고 보면 평안도 지역의 국밥이다. 

왜 한국인들은 이토록 국밥을 즐겨 먹어오는 것일까?

조선시대 사람들은 밥을 많이 먹기로 유명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식(多食)에 힘쓰는 것은 천하에서 으뜸이다. 최근 표류되어 유구(琉球, 현재의 오키나와)에 간 자가 있었는데, 그 나라의 백성들이 너희의 풍속은 항상 큰 주발과 쇠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실컷 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는가 하고 비웃었다고 한다.” 이 글은 조선후기 실학자 이익(李瀷, 1681~1763)이 적은 것이다. 이익은 이것을 두고 먹기를 적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중국 고전에 나오는 문구인 ‘식소(食少)’를 내세워 펼쳤다.

밥을 많이 먹기 위해서는 오로지 벼농사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돈이 되는 다른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데 소홀했다.

왜 밥 먹기에 목숨을 걸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나는 유학의 조상 제사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본다. 생전에 잡수시던 그대로 제사상을 차리는 격식은 중국의 주희(朱憙, 1130~1200)가 편찬했다고 알려진 <가례(家禮)>에서도 강조한 바이다.

주자의 <가례>에서 조상 제사에 올리는 중요한 제물 중에서 주식으로 반(飯)과 탕 그리고 면을 꼽았다. 그런데 문제는 한반도에서는 밀농사가 잘 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결국 밥의 재료 중에서 쌀에 집중된 농사가 이루어졌다.

여기에 ‘탕국’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불리는 제사상의 국이 또 다른 기여를 했다. 아무리 메(밥)와 다른 제물이 많다고 해도 탕국이 없으면 제사를 모실 수 없었다. 이런 관념으로 인해 조선시대 사람들은 식사를 할 때 밥과 국을 으뜸에 두었다. 더욱이 반찬이라야 짠지나 김치 혹은 나물 정도밖에 없던 처지여서 밥과 국을 함께 먹으면 순간적으로 배를 쉽게 불릴 수 있었다. 늦은 밤에 기제사를 모시고 음복을 할 때, 갑자기 늘어난 식수인원의 욕구를 채워주는 데도 국밥은 안성맞춤이었다.

국밥의 이런 속성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끼니를 해결해 줄 때는 반드시 이 음식이 쓰였다.  1920년대 전국의 근대적 도시에서는 한자로 탕반점(湯飯店)이라 불렸던 국밥집들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골목마다 자리를 잡았다. 대구에서는 육개장의 원조인 대구탕반(大邱湯飯), 개성에서는 편수와 만둣국, 전주에서는 콩나물해장국에 모주라는 술지게미 술을 함께 먹는 탁백이국, 겨울에만 영업을 했던 서울의 추어탕, 서울의 오래된 탕반인 설렁탕 따위를 팔았다. 특히 1920년대에는 전국의 읍·면 소재지에 상설시장과 오일장이 자리를 잡았다. 오일장에 가서 먹는 국밥은 장날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장터국밥’이란 음식 이름도 생겨났다.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제공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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