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이 현재와 같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990년대 헤이세이 불황, 잃어버린 30년 이후이다. 흥미가 뻗쳐서 내가 예전에 봤던 애니메이션들을 돌아보면서, 일본의 애니메이션들이 시대별로 어떻게 장기 불황을 받아들였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쇼와 말기 호황기의 애니메이션

일본이 엄청나게 잘나가던 1980년대까지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국제적인 트렌드에서 크게 벗어나는 작품들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일단 해외와의 합작 애니메이션들이 굉장히 많았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그럴싸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이를 일본에서 만드는 방식의 애니메이션들이 많이 나왔었다. 그래서 일본이 디즈니 애니메이션과는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일본 만화 시장과 같이 일본이 아니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수준의 애니메이션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말하자면, 1980년대까지는 미야자키 하야오 류의 애니메이션이 대세였고 현재의 일본 애니 시장과 달리 아동용 애니메이션도 많이 나왔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봐도 오타쿠가 아닌 일본 애니"(도라에몽, 짱구, 미야자키 하야오 등)들이 대부분 이 시절의 일본 애니의 연장선상에 있다.

1단계: 절망

문제는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엔화의 가치가 폭등하면서 인건비가 높아졌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1985년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 회사들은 인건비가 상승하고, 인건비가 상승하여 제작비가 높아지고, 제작비가 높은데 엔화 가치마저 치솟다 보니 해외와 전혀 합작을 할 수 없는 악조건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1990년 드디어 일본의 버블이 터지면서 일본은 끝이 안 보이는 불황의 늪(잃어버린 30년, 헤이세이 불황)에 빠져버린다. 그래서 1990년대 초반 일본 애니메이션 회사들이 줄 도산하고 애니메이터들은 실직자가 되었다.

불황 자체는 1989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이 일본인에게 가시적으로 다가온 것은 1995년 이후가 아닌가 싶다. 고베 대지진으로 일본 최대의 항구였던 고베시에서 6,400명에 가까운 인구가 사망하고, 사이비 종교 신도들에 의한 도쿄 지하철 독가스 살포 사건으로 일본 사회는 그야말로 세기말적인 분위기였다. 이로부터 딱 1년 뒤에 개봉된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아포칼립스 메카 물인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이때의 사회상을 타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1998년에는 미야자키 감독의 <모노노케 히메>가 "살아라"라는 카피를 내세웠는데, 그로부터 2주 뒤에 개봉된 <신세기 에반게리온> 영화판은 "모두가 죽어버리면 좋겠는데"라는 카피를 내세웠다. 두 작품 모두 다 흥행하긴 했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더 많이 언급되는 쪽은 후자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분위기가 확 반전된 것이다.

흔히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일본 애니의 3차 붐이라고 표현하는데, 신에바 이후의 일본 애니메이션이 걸어온 길은 1996년 이전의 애니메이션과 확실히 구분되는 면이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그 이전의 애니메이션들은 대체로 세계와 개인의 관계를 집중하였는데(즉 지브리나 디즈니 식의 애니메이션들) 그 이후의 애니메이션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만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물론 디즈니나 픽사가 개인의 감정에 공을 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두 개인의 관계, 그리고 한 개인의 감정 변화가 더욱 집중적으로 다뤄졌고 바탕이 되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거나, 혹은 아예 개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주객전도의 현상이 이뤄졌다. (이것을 덕후들 사이에서 용어로 "세카이계" 라고 한다)

이것이 1996년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몰고 온 제3차 애니 붐 직후 일어난 현상들이다. 다만 이때는 본격적으로 일본 애니가 현재의 모습을 얻었다고 할 수 없다. 일단 1985년 이후 능력 있던 애니메이터들이 절반으로 줄어버려서 애니메이션 시장이 전반적으로 침체에 빠졌다. 게다가 해외와의 합작이 뚝 끊겨버려서 일본 애니가 일본만의 색채를 찾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기간을 두고서 2000년대 일본 애니계의 침체기라고 부르는데, 대략 2000년대 초반에 시작되어서 2006년쯤에 끝이 났다. 이때는 <강철의 연금술사>와 같은 몇 가지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일본 애니들이 전반적으로 침체되어 있었다.

2단계: 현실 회피

2006년에 들어서 일본 애니는 나름의 전환을 맞이한다. 이 시기는 이른바 유토리 교육이라는 것이 시행된 때였다. 교과목 수업을 30% 줄이고, 동아리 활동과 활기찬 학교생활을 강조하던 교육 방식을 유토리 교육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일본의 암담했던 경제 상황과는 달리 나름 학교생활은 활기찼던 때가 바로 2000년대 중반의 일본이었다. 그리고 대중적인 인식과는 달리 2000년대 중반 일본은 고이즈미 총리의 우정민영화로 대표되는 정부의 의욕적인 불황 극복 의지로 잃어버린 10년을 극복하냐 마냐 하던 때였다. 앞의 말이 다소 당시 일본의 경제 상태를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말이긴 하나 최소한 현재와 같은 희망이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때 방영된 애니메이션이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이라는 유명한 애니이다.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는 완전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향을 천지개벽으로 바꿔버렸다. 학교생활을 강조하고, 희망차고 유쾌하며, 우정이나 개인의 감정을 중심으로 평화로운 일상을 풀어나가는 식의 전형적인 일본 애니메이션의 클리셰들이 거의 대부분 이 애니메이션에서 비롯되었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이 방영되기 전까지 일본 애니메이션들은 개인의 감정을 중시하긴 했지만, 죄다 우울하고 절망적인 분위기투성이였다. 게다가 1960년대에 나온 거대 로봇물들이 40년의 세월을 이겨내고 2000년대에도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세한 묘사나 주제의식 정도만 바뀌고 형식은 바뀌지 않은 당시의 일본 애니메이션에 상당히 많은 시청자들이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건, 이 하루히즘에 속하는 애니메이션들이 사회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때부터 어느 정도의 조짐을 보이고 있던 것이기는 하지만 2007년 이후 일본 애니에서는 일본이 처한 현실을 다루는 애니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일종의 현실 회피다. 그저 낙관적인 학창 시절만을 다루고 있을 뿐인데, 이게 2010년대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의 분위기가 바뀌는데 일조하게 된다.

​아무튼 그래서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이 방영된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은 희망차고 밝았던 학창 생활과, 나름 희망이 보였던 일본 경제 상태를 반영하듯이 조금 더 일상적 감정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어떤 마술의 금서 목록>이나 <역시 내 청춘 러브 코미디는 잘못되었다>와 같은, 전형적인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이때의 경향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던 일본 애니 시장이 2010년대 들어서 또다시 변혁을 겪게 된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의 사회는 크나큰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후쿠시마가 지역구인 민주당 의원은 제일 먼저 규슈로 도망쳤고, 도쿄전력과 간 나오토 내각의 처참한 대응 능력은 일본인들에게 일본은 뭘 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인식을 남겼다. 게다가 유토리 교육이 실패한 것 역시 큰 영향을 미쳤다. 기초적인 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부 활동에 연연한 유토리 세대들은 일본에서 가장 멍청한 세대가 되었다. 하루히 시리즈를 보고 자란 고등학생들이 사회에 나갔는데 대지진으로 경제는 쑥대밭, 정치는 아무도 뽑을 사람이 없는 난장판, 그리고 사회는 노인이 전체 인구의 35%를 차지하는 노인정이 된 상태였다. 한마디로 말해 사회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이 희망찬 학교생활을 보낸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서 현실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3단계: 현실 부정

이런 시점에서 하루히 시리즈의 긍정적인 분위기를 청년들이 이어나가기 힘든 구조가 된다. 그래서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2012년 아베 내각의 성립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은 크게 3가지로 나뉘었다.

- 현실 부정형: 이세계물, 판타지 (소드 아트 온라인)

- 현실 극복형: 소년만화, SF, 다크판타지 (진격의 거인)

- 현상 유지형: 하루히즘 (역시 내 청춘 러브 코미디는 잘못되었다)

문제는 저 3가지의 유형이 모두 어딘가가 일그러져있다는 점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2011년 이후 뭔가 바뀌긴 했는데, 그 과정이 굉장히 엉성하고 뭔가 핵심적인 답을 속 시원하게 내놓은 것이 없다.

일단 일본 애니메이션은 근본적으로 만화(ex: 귀멸의 칼날)나 웹 소설(ex: 소드 아트 온라인. 이해하기 편하도록 웹 소설이라고 했지만, 일본에서는 이걸 라이트 노벨이라고 부른다. 라이트노벨은 인터넷으로 나온다기보다는 종이책으로 나오지만, 내용이 웹 소설이다) 또는 원작이 없는 순수 창작(코드기아스)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예전에는 웹 소설 양식이 편집부의 검수를 받았는데, 2010년대 이후로는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그야말로 아무나 웹 소설을 올릴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이런 웹 소설을 쓰는 세대가 일본에서 제일 멍청한 세대인 유토리 세대들이다. 무사태평한 학창 생활을 보내서, 정말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웹 소설을 써댄다. 당연히 문학적인 지식도,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 의식도, 심도 있는 구성도 없는, 단순 흥미 위주의 소설이 쏟아져 수천만의 조회 수를 기록하게 된다. 이걸 애니메이션 회사들이 돈이 된다고 냉큼 집어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내놓는다.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이 난장판이 된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2010년대에 들어서는 1980년대 일본 애니의 전성기 당시 활동했던 애니메이터들(오시이 마모루, 미야자키 하야오, 토미노 요시유키)이 상당수 은퇴한다.

세 가지의 문제점이 있었다. 첫 번째로, 이들은 1985년 플라자 합의 이전 마지막으로 해외의 영화 시장에 맞춰 활동해 본 애니메이터들이었다. 그나마 이 사람들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막 나가는 갈라파고스화를 제어해 주는 역할을 했었다. 두 번째로 이런 사람들이 창의적인 스토리를 생각해 내면서, 하루히즘으로 대표되는 2000년대 이후 일본 주류 애니와는 다른 비교적 범위가 넓은 예술적인 영화들을 많이 만들었었는데, 이 사람들이 전부 은퇴하면서 그런 영화들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 세 번째로는 그나마 이 1980년대의 애니메이터들 중에서 일본 공산당 소속의 전공투 출신이 많아서, 막 나가는 군국주의 전체주의식 묘사들을 제어하고 일본의 현실 정치를 비판하는 일종의 현실 참여적인 역할을 맡았는데, 이 사람들이 전부 은퇴하니까 그런 걸 할 사람이 없어졌다.

이러한 문제들로 촉발된 2010년대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심도 있는 생각이 안 보인다는 점이다. 가령 말하자면, 캐릭터들이 너무 단편적이고 강력해서 뭘 하든지 일이 일사천리로 해결된다. 비판 의식은 결여되어 있어서 할리우드 액션 영화들을 현실 비판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어쩌다가 정치를 비판하기는 하지만, 그 방향이 매우 엉뚱하다. 예를 들자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날씨의 아이>는 일본의 전체주의화를 비판하고 있다고 하는데, 보고 있으면 그냥 개인의 경솔한 이기주의를 옹호하는 내용밖에 안된다. 이 경우가 나은 거고 그마저도 없는 경우가 많다. 그 외의 문제점을 언급하자면, 차차 해결해 나가야 될 문제들이 너무 빨리 풀리고, 작품 내에서의 갈등의 깊이는 너무나도 얕다. 그나마 <귀멸의 칼날>이나 <도쿄 구울> <진격의 거인> 과같이 평론단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애니메이션은 나오고 있지만, 이 역시 개인의 강함을 강조하는 선상에서 멈춰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한계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야말로 현실이 바뀌지 않으니, 현실을 부정하여 멋진 이상 속에 갇히거나, 혹은 현실을 비틀어서 편의주의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겠다는 일본 청년들의 열망이 보인다. 2010년대 이후로 일본 애니가 보이는 가장 큰 특징이 이 세계 물의 범람이다. 역사도, 정치도, 현실도 싫기 때문에, 현실과는 다른 판타지 세계에서 마음껏 기부리며 살겠다는 것이다. 현실의 일본은 이미 회복이 불가능한 병든 국가이기 때문에, 일단 개인의 위신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며, 따라서 자신의 이상은 일본이 아닌 다른 판타지 세계에서 이루겠다는 그런 헛된 꿈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져간다.

4단계: 무관심

이러한 경향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2021년 코로나 사태가 터졌고, 결국 아베노믹스는 실패한 정책이 되었다. 2020년대 이후 일본의 사회 역시 어느 정도 변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애니메이션의 시장 역시 조금씩 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귀멸의 칼날이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나 에반게리온에 맞먹는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멸의 칼날이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성공했고(내가 2019년 처음 귀멸의 칼날을 봤을 때만 해도 파급력은 덕후들 사이에서만 있었고 일반인들은 알지도 못했다), 나름 일본 애니메이션의 변혁 과정을 직감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런 귀멸의 칼날이나 주술 회전과 같이 2020년대 이후 일본에서 히트친 애니들을 보면, 현실 회피라기보다는 거의 무관심에 가까운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귀멸의 칼날이나 주술회전의 주인공들은 옛날의 미야모토 무사시에서 모습을 가져온 것 같은 전형적인 무사들의 캐릭터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오히려 198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분위기이다(이것을 내가 2020년 귀멸의 칼날 히트 당시 지적한 적이 있었다). 현실이 어떻게 되는지, 자기 꿈이 어떻게 되는지는 관심이 없고, 그냥 강한 캐릭터에 마음을 투영해서 아예 무관심으로 일관하겠다는 식의 태도가 약간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귀멸의 칼날과 주술회전이 엄청난 히트를 치는 것을 보고 그런 것들을 느꼈다. 아직 2020년대의 애니메이션이 많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섣불리 단정 내리지 않을 것이다(무엇보다 무관심이라는 타이틀만으로 귀멸 현상을 분석하기 어렵다).

총론

내가 일본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최근의 작품들을 많이 본다기보다는 1990년대 이후 명작들을 쭉 훑어서 보는 걸 선호하는 편이다. 그런데 1996년, 2006년, 2011년, 2021년으로 나눠서 그 시대의 애니메이션을 보자면, 절망에서 회피로, 회피에서 부정으로, 부정에서 무관심으로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인다. 일종의 사망을 받아들이는 5단계 같아 보인다.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전반적으로 현실 참여 의식이 적은 편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일본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잃어버린 30년을 받아들였는지가 뚜렷하게 보여서 재미있다. 30년 이후 한국의 영화들이 변화한 과정을,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주술회전까지 일본 애니메이션이 변한 과정과 비교해 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내가 이 글에서 일본 애니에 대해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긴 했지만, 최소한 이 글에서 언급된 모든 애니들은 내가 대부분 긍정적으로 시청했던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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