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드로 윌슨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3.1 운동에 영향을 준 "민족자결주의"로 잘 알려져있다. 민족자결주의 자체가 위선이고 말 뿐이라는 비판은 있으나 그것이 한국 역사에 미친 영향력만 놓고본다면 악보다는 선이 훨씬 클 것이다. 그러나, 윌슨의 업적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윌슨은 근본적으로 미국 역사를 바꾸었으며, 연방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 명확하게 규정하였다. 그는 뉴딜이 있기 전에 뉴딜이 있을 수 있게한 대통령이었으며 미국 정부의 진정한 아버지였다.

I. 우드로 윌슨은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나

우드로 윌슨은 사실 정치인이 아니었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교의 총장을 지낸 학자 출신이었다. 그의 연구 분야는 행정학이었다. 행정학이란 정부의 기능을 다루는 학문으로, 윌슨이 집중했던 분야는 미국 연방정부의 기능과 관련된 문제였다. 앤드루 잭슨 이래 미국에서는 능력과 관계 없이 정권을 잡은 세력의 의제에 찬성하는 정치인에게 연방 관직을 나눠주는 "엽관제"가 관례로 자리잡았다. 이는 정부의 정책 방향성을 설정하는데에는 좋았지만 19세기 후반에 들자 계파정치와 부정부패를 일으키는 요소가 되어 지탄을 받았다. 윌슨은 엽관제의 폐혜를 극복하고 정부가 단순한 계파정치적 요소 외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작용해야하는지 연구했고, 박사학위(Ph.D.)를 받았으며, 연방정부의 권한과 역할에 대해 좋은 책과 논문을 작성했다.

그는 정부 개혁론자로 민주당에 입당했고, 1910년 뉴저지 주지사로 출마해 당선되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본래 1912년 대선의 프론트 러너가 아니었다. 원래 유력했던 사람은 하원의장 챔프 클라크였다. 그러나 1896년, 1900년, 1908년 총 3차례나 걸쳐 대선에 출마한 진보주의의 지도자 윌리엄 J. 브라이언은 부패한 클라크 대신 청렴하고 개혁의지가 높은 윌슨을 더 선호했고, 우드로 윌슨을 지지해 그가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렇듯 윌슨은 연방정부 역할의 개혁을 기치로 출마한 후보였다.

1912년 대선은 원래 공화당이 유리했다. 하지만 다소 보수적인 윌리엄 H. 태프트 현임 대통령에 맞서 진보적인 계파를 이끌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이 3지대 독자출마를 선언했다. 한편 좌익 진영은 저명한 사회주의자인 유진 V. 데브스를 제4의 후보로 추대했다. 이렇게 사분오열된 판세에서 우드로 윌슨은 겨우 42%밖에 얻지 못했음에도 28%의 루스벨트와 23%의 태프트, 7%의 데브스를 꺾고 어부지리로 당선된다.

II. 국가를 개혁하다: 헌법 개정

윌슨은 취임 초기 여러 우려를 받았다. 그는 주류 정치권에서 사실상 어부지리로 당선된 샌님 학자 이미지였고, 대중적으로는 남북전쟁 이후 처음으로 남부 출신인 대통령이라는 점에서(그는 버지니아 태생이었으며 조지아에서 자랐다) 남부연합과 노예제도를 찬양하는 역사수정주의적 관점을 견지하지 않는지 의심받았다. 그러나 윌슨은 대중적, 정치적 시각이 어떻든 자신이 믿는 바를 추진했으며, 주요 정계 인사와 대중의 여론을 악화시킬 수도 있는 야심찬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의 가장 눈에 띄는 개혁은 수정헌법 17조와 19조이다. 17조는 상원의원 직선제에 대한 규정이며 19조는 여성참정권에 대한 규정이다. 우선 17조는 정부 부패와 관련이 있다. 기존 상원 의원은 주민이 아닌 주의회에 의해 선출되었다. 그런데 이 때문에 주의회 의원끼리 다툼이 일어나고 계파정치에 따라 상원의원직이 좌우되는 일이 일어났고, 주민의 의사가 원활히 작용되지 않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이를 개혁해야한다는 공감대 덕분에 1912년 윌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해에 미국 의회는 상원의원을 주민 직선제로 바꾸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100% 윌슨의 공적은 아니지만, 윌슨의 정부개혁에 대한 의지는 수정 17조가 각 주에서 비준되어 효력을 발휘하며, 각 주에서 상원의원 직선제가 잘 정착할 수 있는데 큰 영향을 줬다.

19조 역시 주목할만하다. 윌슨은 원래 여성 참정권론자가 아니었다. 그는 1912년 대선에서 여성참정권에 반대했다. 하지만 그는 재임 도중 점차 여성의 정치적 권익에 우호적으로 변하였으며, 성인 남성만이 아닌 성인 여성 역시 공정한 투표권을 가져야 정부가 정상적으로 모든 국민을 대변하는 기구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윌슨은 1916년 대선에서 재선한 후 여성참정권을 추진했으며, 그가 퇴임한 해인 1919년 미국 의회는 수정헌법 19조를 통과시키고 1년 후인 1920년 각 주가 이 헌법을 비준하며 미국은 세계적으로도 이른 시기에 여성참정권을 통과시킨 국가가 되었다(대조하자면 스위스는 1974년, 프랑스는 1958년, 영국은 1945년에 여성참정권을 인정했다).

윌슨의 금주법 거부권을 비난하는 1919년의 기사
윌슨의 금주법 거부권을 비난하는 1919년의 기사

그렇다면 18조는 무엇에 관련된 법률이었는가? 그것은 금주법이었다. 이른바 볼스테드법이라 불리는 수정헌법 제18조는 미국 내에서 술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윌슨은 이 법에 반대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었는데, 당시 국가적으로 금주법을 지지하는 여론이 압도적이었을 뿐더러 좌익 진영에서는 로버트 M. 라폴레트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금주법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윌슨의 사위인 윌리엄 G. 매커두 재무장관도 금주법을 지지했음을 고려하면 윌슨의 소신은 주목할만한 것이다. 윌슨은 이 법이 너무나도 터무니 없고 술을 근절할 수도 없으며 밀주의 거래만 늘릴 악법이라고 정확하게 진단했다. 불행히도, 의회와 국민들은 윌슨의 경고를 노망이라고 여겼고, 의회는 압도적인 표결로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효화했다.

III. 노동자와 농민의 대통령

윌슨의 이미지가 따뜻하고 인자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는 미국의 대통령 중 가장 노동자와 농민의 권익을 크게 신장시킨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 노동자의 편이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실 19세기 말에는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가 노동조합을 분쇄하는 대기업의 악행을 지지했다. 20세기 초 윌리엄 J. 브라이언과 같은 진보주의자들이 민주당의 대표 정치인으로 부상했지만, 이들의 기반은 농촌이었고, 도시 노동자의 권익을 인상하는데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다. 반면 윌슨은 농촌의 농민과 도시노동자의 권익을 신장시키는 여러 개혁안을 통과시킨 거의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우선 농민부터 보자면 1913년 언더우드 관세법이 가장 좋은 예시이다. 법을 입안한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오스카 J. 언더우드(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의 주인공이 이 사람의 성을 딴 것으로 유명함)의 이름을 딴 법이지만 실질적인 입안자는 윌슨 대통령이다. 이 법은 40%에 달하던 관세를 26%로 인하하는 것이었다. 즉, 공화당 정권의 보호무역 기조를 철폐하고 자유무역을 장려했다. 현대적 관점에서 자유무역은 신자유주의의 산물이지만 이 당시에 농민들은 자유무역을 환영했다. 다른 나라에서 보복관세로 농작물 수출을 막으면 골치아픈데다 해외에서 농작물과 식량을 사올 때 너무 높은 관세는 그들에게 매우 나빴기 때문이다(반면 자신들의 사업이 보호받기를 원했던 금융계는 보호무역을 지지했다). 이때는 인도와 중국이 아닌 미국이 세계 최대의 농작물 수출국이었음을 감안해야한다. 일찍이 1891년 공화당은 매킨리 관세법으로 관세를 무척이나 높여 농민들에게는 원성을, 금융자본가들에게는 환호를 받은 바 있다. 관세 인하는 1891년 이래 농민들의 최우선 숙원사업이었는데, 윌슨이 이를 반영해 금융 자본가들의 반발을 무릎쓰고 14%나 관세를 인하하는 법안에 취임 직후 서명한 것이다.

농민평생학교를 설립한 스미스-레버법, 스미스-휴즈법도 윌슨의 업적이다. 별것 아닌 것 같아보이지만,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농민을 국가에서 교육시키는건 생소한 개념이었다. 국가에서 책임지고 농민들이 더 많은 농작물을 생산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건 당대에는 혁신이었다.

노동자의 경우, 윌슨은 노동법과 관련해 일대의 혁명을 일으켰다. 우선 1914년 라폴레트-피터스 법은 워싱턴 D.C.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의 8시간 노동을 보장했다. 1916년 애덤슨법은 철도 노동자의 8시간 노동과 주당 최대 40시간 노동을 명시했다(이것을 보면 주 60시간 노동을 부르짖는 한국 보수파는 참으로 시대를 앞서나갔다는 생각이 든다). 겨우 DC 공무원과 철도노동자 상대로만 시행했다고 하니 김셀 수 있지만, 이 당시에 기업에게 최대 노동시간을 강제하는건 공산전체주의 사상이었다. 연방정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공무원과 철도노동자들이 좋은 대우를 받으며 일하면 다른 기업의 노동자들이 자극을 받아, 결국 민간 기업도 마지못해 8시간 노동, 주 5일 노동제를 도입할 것이라는게 윌슨의 현실적인 대처였다.

상해보상의 도입도 훌륭한 점이다. 1916년 컨-맥길디 법은 상해노동자에게 기업이 강제적으로 보상금을 제공하게 했다. 1914년에는 우체국 직원을 상대로 상해보험이 도입되었다. 도대체 이게 뭐가 중요하냐 하겠지만, 당시 우체국 직원은 동부에서 서부를 말과 증기기관차 하나로 가로지르고 로키산맥을 혈혈단신으로 넘어가다가 인디언의 습격도 받을 수 있는 극한직업이었다. 또 우체국 공무원은 당시 미국의 영토 크기와 이에 대비되는 교통수단의 미진함으로 인해 연방 공무원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즉 고생하는 공무원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할 수 있게 한것. 같은 이유로, 윌슨은 전사한 군인의 유가족에게 6개월간 추가적인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법에 서명했다.

마지막으로 아동노동과 관련해서는 키팅-오언 아동노동 규제법이 있다. 이 법은 당시 사회적 병폐였던 아동노동을 사실상 불가능할정도로 강하게 규제하는 것이었다. 아동노동은 이 법의 영향으로 윌슨의 재임 기간 중 50% 감소했다. 얼마 안가 미국 의회는 아동노동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다. 아동노동이 금지되었을 때 마지못해 아동 노동자를 풀어준 기업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키팅-오언법은 아동노동을 점진적이지만 효과적으로 근절시켰다.

IV. 대기업을 규제하다

윌슨의 또다른 업적은 대기업을 규제하고 독점기업을 해체했다는 점에 있다. 많은 이들은 이것이 루스벨트의 업적이라 말한다. 반은 맞는 소리이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한정적이었으며 사실 윌슨이 제도적으로 독점기업 해체를 보완하지 않았다면 루스벨트의 개혁은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1890년 셔먼 반독점법과 1914년 클레이튼 반독점법의 차이 때문에 그렇다. 1890년의 셔먼 반독점법은 분명 기업을 규제하는 법이었다. 그러나 발의자인 존 셔먼은 사실 대기업 문제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고 그냥 서민들이 난리를 치니까 공화당의 대표적인 중진 의원으로 불려나가서 대표발의자 역할만 맡은 것에 가까웠다. 이에 맞게 법은 매우 대충 구성되었다. 거대 기업이 법을 그냥 회피할 수 있게하는 단서조항이 곳곳에 포진해있는가 하면 반독점법의 대상을 노동조합까지 확장시켰는데, 이는 대기업이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단결권을 독점하고 있으니 노동조합을 잘게 잘게 부수는건 반독점 행위"라는 해괴한 주장을 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루스벨트가 이 법을 잘 이용해서 록펠러 가문에게 한방 먹인 것은 맞지만, 그것은 제도적이라기보다는 루스벨트 개인의 리더십에 의존한 것이었다.

윌슨은 달랐다. 루스벨트 같은 리더십은 없었지만 제도적으로 반독점법을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보완했다. 클레이튼 반독점법은 노동조합을 무너트리고 대기업이 빠져나갈 구실을 주던 기존의 반독점법의 내용을 삭제했다. 이 법의 6번째 조항은 "보이콧, 평화적 파업, 평화적 피켓 시위, 단체 교섭, 노동 및 농민조합은 반독점법의 영향을 받지 않음"을 명시해 노동조합의 정당한 단체교섭권과 단결권을 보장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간 인수 및 합병을 규제한 7번째 조항이었다. 셔먼 반독점법은 독점을 "담합"으로만 규정한 반면, 클레이튼 반독점법은 "인수와 합병으로 인한 단일 기업의 시장 지배"를 독점으로 규정했다. 따라서 록펠러나 벤더빌트, 카네기와 같은 여러 기업체들이 고만고만한 기업을 모조리 합병해버리고 자신의 업종에서 폭리를 취하는 현상을 근본적으로 방지했다. 더 훌륭한 점은 윌슨이 반독점법으로 인해 부당하게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기업인이 있을 경우 공정한 절차를 거쳐 사법 심리를 거쳐 자신의 재산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하는 보상 체계를 추가적으로 구성했다는 점이다. 즉 1914년 클레티튼 반독점법은 노동자, 기업, 국가, 소비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법이었다.

이 법의 후속 조치 중 가장 위대한 것은 1914년 연방거래위원회법으로 창설된 연방거래위원회 (Federal Trade Commission) 즉 FTC였다. FTC는 클레이튼법이 단순한 법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도록 했다. 이 법은 불공정한 사업 관행을 파악하고, 독점을 규제하며, 한편으로는 억울한 기업인들을 보상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이전에는 이렇게 사업 전반에 관여하는 연방 단위의 기관이 없었다.

V. 평가

에이브러햄 링컨은 죽기 직전의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이 전쟁이 끝나면 은행가들이 새로운 노예주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네. 그러면 이 나라의 사람들은 또다시 돈이라는 관계 하에 속박된 노예가 되겠지. 하나님이 내 예측이 틀리다는걸 보여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링컨의 예측은 정확했다.

1870년대 철도붐을 타고 벤더빌트, 카네기, 록펠러와 같은 재벌 기업인들은 인수합병을 통해 하나의 작은 나라와도 같은 막대한 부를 쌓았다. 한편으로는 농민과 노동자는 굶주렸고 아이들은 아동 노동에 시달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8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 인민주의자들이 들고 일어섰다. 역사가 하워드 진의 평가에 의하면 미국 역사상 가장 역동적이고 헌신적인 농민의 대변자였던 그들은 폭리를 취하는 은행과 기업을 해체하고, 농민과 노동자를 위해 낮은 이자의 대출, 소액화폐 발행, 농지개혁, 자유무역 등을 추구했다. 1896년, 그들은 민주당 대선 후보로 윌리엄 J. 브라이언을 선출했다.

그러나 브라이언은 은행가의 이익을 앞세운 윌리엄 매킨리에 패배했다. 인민주의자들의 정책은 매킨리의 균형잡힌 정책에 비해 너무 급진적이고 몽상론적이었으며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40년 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휠체어에서 일어나 뉴딜 정책을 추구하자 거의 모든 모순이 해결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노동조합의 단결권을 보장한 1935년의 와그너법, 월스트리트를 규제한 글래스-스티걸법, 모든 빈자들이 복지를 받을 수 있게하는 사회보장법이 통과되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1890년대 은행가들과 거의 모든 언론으로부터 비현실적 몽상론이라 공격받던 인민주의자들의 의제가 어떻게 성공적으로 40년 후까지 살아남아,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일까? 대중 역사가들은 오랜 기간동안 인민주의자들과 루스벨트 사이의 잊혀진 고리에 대해 묵과해왔다.

미국 자유주의의 원형을 제시한 사람들. 왼쪽부터 FDR, 우드로 윌슨, LBJ.
미국 자유주의의 원형을 제시한 사람들. 왼쪽부터 FDR, 우드로 윌슨, LBJ.

윌리엄 J. 브라이언은 1912년 대선 때 윌슨을 지지했다. 그가 진정한 개혁주의자라는 이유에서였다. 동시에 하이드파크의 부호였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우드로 윌슨의 개혁 정책을 지지했다. 인민주의자의 대표인 브라이언과 FDR이 1912년 같은 후보를 지지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우드로 윌슨은 분명히 그의 생애동안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 투쟁하지는 않았다. 그는 차가운 사람이었다. 파티장에서 모두가 신나게 춤출동안 책 읽는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매정한 성격 때문에 친구도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무엇이 나라를 위해 옳은 것인지 알았다. 그는 미국이 186-90년대, 그리고 1910년대의 막대한 양극화, 인권 탄압, 농촌의 파멸, 극소수 부호들의 독점과 같은 사회적 모순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초강대국으로 올라설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윌슨은 대통령으로서 몽상론도 지독한 현실론도 아닌 중간지점의 타협안을 지속적으로 택했다. 그는 기업의 자유, 대중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거대한 기업을 규제하고, 독점을 해체하면서 농민과 노동자의 권리를 정당하게 보장할 수 있는 효과적인 입법을 발의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당대 미국에서 보기 드문 것이었다. 매킨리, 태프트, 심지어 시어도어 루스벨트마저도 근본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사회병폐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들의 대응은 대체로 임시방편이었고 개인의 강력한 카리스마에 의존했다. 왜냐하면 연방정부가 법과 기관, 제도를 통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개념이 당시 미국에 미진했기 때문이다. 윌슨이 이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연방정부가 나서서 농민과 노동자의 권익을 보장하고, 잘못된 사회 병폐의 모순을 해결해야한다는 점을 명확히했다. 원칙을 세우면 좋은 정책이 따라나오는데 뉴딜이 윌슨이 추구한 개혁의 좋은 후속 정책이다.

즉, 윌슨은 19세기 미국 사회 병폐를 해결하기 위한 이상론자와, 20세기 중반 복지국가를 건설하고자 한 뉴딜 자유주의자들을 잇는 보이지 않는 고리라고 할 수 있다. 시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는 꿈과 현실을 매게한 다리였다. 이것이 윌슨의 개혁에 대한 가장 의미있는 역사적 평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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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만가지고는 윌슨이 왜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인지 알기 어렵다. 다음 글에서는 윌슨이 연방준비제도와 1차대전 참전을 통해 어떻게 미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전진시켰을 뿐 아니라 연방정부의 개념을 형성했는지에 대해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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