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년의 음악: 문화산업에 대한 저항

1968년 혁명은 산업화에 대한 저항이었다. 문화산업론은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제시한 개념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가 획일적이고 표준화된다는 뜻이다. 20세기 대중문화는 인간의 심미와 감정을 드러낸 원초적인 표현에서 벗어나,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이를 토대로 "돈을 벌 수 있는" 산업으로 격하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돈이 될만한 문화매체만이 창출되며, 오랜 시간을 거치며 자본주의 사회 하에서 문화는 획일화되어버리게 된다. 아도르노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충격을 주는 예술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가 지향하는 예술은 원초적인 전위 예술이다. 아도르노는 바람직한 예술은 관람자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쾌하게 만듦으로서 감상자로 하여금 충격을 받게 하고, 더 나아가 사회의 부조리를 직시하게 해야한다고 본다.

오늘날의 대중매체 산업은 획일화, 표준화, 산업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음악 산업을 예시로 들자면, 언론은 K-pop과 라틴팝, 미국의 음악이 모두 다르다고 하지만, 현재 음악의 장르는 몇몇 특출난 아티스트를 제외하면 거기서 거기인 것이 사실이다. 일부 번득이는 아티스트들은 음악계를 선도하고 있지만 나머지는 진부한 사랑 타령, 어디서 본듯한 멜로디만을 가지고 노래를 쓴다.

한국의 경우, 공장에서 생산된듯한 아이돌 산업이 음악계를 지배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이런 표준화되고 진부한 음악 산업이야말로 돈이 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음악의 가치를 죽였다.

 

그렇다면 1968년의 음악 시장은 달랐는가? 1968년의 문화는 여러가지로 대변된다. 요제프 보이스의 행위 예술이나 페터 한트케의 실험극, 여러 사회고발적 영화 등등이 있으며 음악도 이와 맥락이 비슷하다. 크게 보았을 때 실험적인 전위 음악(벨벳 언더그라운드의 <Velvet Underground and Nico>), 사회참여적, 사회고발적인 음악(마빈 게이의 <What's Going On>), 기성 세대를 비난하고 마약 투약이나 쾌락 등을 찬양하는 반항적인 음악(도어즈의 <Light My Fire>, 더 후의 <My Generation>)이 있다.

미술품이 된 앨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앨범 자켓 : 위 앨범 커버를 자세히 보면 "Peel slowly and see(천천히 껍질을 벗기고 보라)"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다
미술품이 된 앨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앨범 자켓 : 위 앨범 커버를 자세히 보면 "Peel slowly and see(천천히 껍질을 벗기고 보라)"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다

1967년~1970년대 초반은 이런 종류의 음악이 가장 히트를 친 때라고 볼 수 있다. 그때의 전위적이었던 이른바 사이키델릭 음악을 예찬할 때, (필 콜린스와 본 조비로 대표되는)1980년대의 양산형 팝과 다른 순수성이 있었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전 글의 요지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에 나온 여러 사이키델릭 음악은 그 영향력이 죽은 것이 아니라 1980년대 팝과 현재의 여러 음악적 사조가 등장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하다. 정치적인 것 이외에도 음악적, 산업적으로 1980년대의 미국 팝은 1960년대 영국과 미국의 사이키델릭 / 전위 음악에 그 직접적인 뿌리를 두고 있다.

음악 장르적 계승

예를 들어 1960년대 음악의 직접적 후계 장르로 불리는 프로그레시브 장르가 있다. 프로그레시브 장르는 기존 팝과 록 음악 장르에 재즈, 클래식 음악의 요소를 결합한 영국의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음악 갈래를 의미한다(미국이나 이탈리아, 독일의 음악가들도 많지만 이 시기 유명한 음악가들은 대부분 영국에서 나왔다). 이른바 락 부심을 좀 부린다는 사람이 이 갈래의 음악가들을 예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제네시스의 노래인 "Supers Ready"는 재즈의 곡 전개에서 영향을 받아 총 22분에 달하는 교향곡의 형태를 띄고 있으며, 핑크 플로이드의 "Echoes"는 러닝타임이 23분 34초에 달한다. 그 주제 역시 사랑 타령이 아닌 불교 명상(예스의 Close to the Edge), 미래에 대한 두려움(핑크 플로이드의 Time), 반전주의(킹크림슨의 21th Century Schizoid Man),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플로이드의 Have a Cigar), 주입식 교육 비판(슈퍼트램프의 Logical Song) 등 다양하다고도 실험적이다. 이러한 음악이 어떻게 1980년대의 팝과 같을 수 있는가? 일부 팬이 자부심을 갖는 것도 당연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Zyj1K5Lyr_Y&t=4s

그러나 이들이 결국 어떤 음악을 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들의 음악이 어떻게 발전했는가를 감안한다면 그들이 1980년대와 이후의 팝으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1970년대 중후반, 이들 프로그레시브 음악가들은 부침을 겪는다. 그들의 음악은 너무 난해했고, 클래식과 재즈라는 장르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에 상당한 엘리트 음악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곡 창작은 커녕 입문하기도 어려웠다. 10분을 넘어가는 곡 길이 때문에 라디오 방송국은 그들의 노래를 거부했고 음반 판매량은 10만장을 겨우 넘었다(이 시기에는 CD가 없었으므로 괜찮은 앨범들은 100만장, 300만장 씩 팔렸다. 핑크 플로이드는 앨범마다 2,000만장씩 팔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플로이드를 프로그레시브가 아니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1977년, 비 지스는 <토요일 밤의 열기 OST>를 발매한다. 총 3,500만장이 넘게 팔린 이 음반은 디스코의 시대가 개화했음을 알렸다. 대부분의 프로그레시브 밴드들이 이때 해체되거나 쇠락세에 접어든다(플로이드 1979년, 제네시스 1974년, ELP 1979년).

그런데 이들은 죽지 않았다. 이들의 음악적 특징이 그들을 되살렸다. 프로그레시브 음악가들은 재즈, 아방가르드, 클래식의 영향으로 당시 팝이나 락 음악에서 자주 사용되지 않던 전자 키보드나 전자 오르간, 색소폰 등을 사용했다. 이것을 바탕으로 그들은 1980년대 다시 무대에 올랐지만 이전과 같은 형태는 아니었다. 1974년, 리더 피터 가브리엘이 탈퇴한 프로그레시브 밴드 제네시스는 드러머 필 콜린스를 리더로 하여 새출발을 한다. 필 콜린스는 제네시스 음악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다채롭고 호화로운 악기 구성은 거의 건들지 않으면서도 러닝타임을 줄이고, 팝적인 요소를 도입하는 등 대중화를 위해 노력했다. 제네시스가 1980년대에 발표한 여러 앨범은 30만장이나 팔리면 흥행했던 1970년대 초반과 달리 수천만장 가까이 팔렸다. 대체로 이런 경향성이 1970년대 후반~1980년대 프로그레시브에서 관찰된다. 킹 크림슨의 <Discipline>(1981)은 뉴웨이브의 영향을 받았고, 플로이드의 <Another Brick in the Wall>(1979)는 디스코 음악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기존의 음악에서 완전히 탈피한건 아니다. Discipline은 킹 크림슨의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 할만하고 슈퍼트램프의 <Breakfast in America>는 그들의 (좌파적인) 냉소주의를 한결 더 강화한 역작이다.

키보드, 신디사이저 등을 이용한 그들의 음악은 디스코에 지쳐있던 영국과 미국의 관객을 사로잡았다. 1981년, 본래 프로그레시브 밴드였던 미국의 밴드 저니는 <Don't Stop Believin'>, <Open Arms>, <Who's Cryning Now> 등을 발표한다. 이 곡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어덜트 컨템포러리라는 새로운 장르의 등장을 알린다. 이 곡의 특징은 기존 프로그레시브의 특징이라 할만한 다채로운 신디의 사용과 곡 구성 구조를 유지했으면서도 팝적, 대중적 요소를 포함했다는 점이다. 어덜트 컨템포러리라는 장르는 이후 일본의 시티팝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음악은 1980년대 초반 미국 팝이 디스코를 극복하고 "미국식 팝"이라는 대열에 합류했다.

이처럼 1980년대에 유행했던 여러 그룹들, 그리고 1990년대에도 유행했던 여러 그룹들의 노래가 1960년대의 노래에 직접적 영향을 받았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흔히 말하는 이 팝이라는 음악은 1960년대의 전위음악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프로그레시브 장르를 넘어서 보더라도 그러하다. 미니멀한 음악 구성을 보여준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1970년대 브라이언 이노의 미니멀리즘을 거쳐서 1979년 토킹 헤즈의 포스트펑크로, 그리고 이후의 너버나로 이어졌다. 오늘날 주류 락의 위치를 차지하는 팝펑크는 1960년대 아방가르드 미니멀리즘에서 유례한다. 뉴웨이브는 어떤가? 실험적 악기나 제3세계의 음악을 사용해 락이 표현할 수 있는 음악적 범위를 넓힌 1960년대의 전위음악은 1970년대 토킹헤즈를 비롯한 여러 초기 뉴웨이브 밴드에 영향을 주었다. 토킹헤즈의 음악을 들어보면 톡톡 튀면도 절제되어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흥겨운 음악적 특징이 보이는데, 본래 시초는 아방가르드였다. 이들은 한국에서 트로트라 불리는 대중적 팝 장르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상업적 계승

음악 장르적으로만 1968년의 음악이 1980~1990년대 이후의 팝에 영향을 줬다면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더 본질적으로, 1960년대 음악이 현재 팝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음악산업적 구조를 구성하는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핵심이다.

1940년대 폭발적인 신생아 수 성장은 1960년대 새로운 리스너의 폭증을 가져왔다. 새로운 리스너는 곧 새로운 관중을 의미했다. 늘어난 관중을 충족하기 위해 밴드는 더 넓은 공연장을 필요로 하였고, 수만명을 수용하는 거대한 스타디움에서 공연이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비틀즈와 같은 극소수 밴드만이 스타디움에서 공연했지만 이내 거의 모든 밴드가 스타디움 공연을 가졌다. 더 넓은 장소에서 공연하게 되었기에 이 시기의 밴드는 프랭크 시나트라 식으로 원맨 플레이를 할 수 없었다. 관중을 만족시킬만한 다채로운 이펙트와 볼거리를 제공해야했다. 1950년대 이후 계속된 경제적 풍요는 밴드에게 이것을 가능하게하는 막대한 자본력을 제공했다.

또한 경제적 풍요로 이전과 달리 20~30대 관중의 소비력이 증가함에 따라, 밴드는 이들의 소비를 바탕으로 부가 수입을 올리는 전략을 채택할 수 있었다. 밴드의 이름과 사진이 붙은 티셔츠나 머그컵을 파는 것은 밴드의 이름을 알리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1960년대의 경제적 상황은 교통수단의 발전, 홍보 수단의 다각화 등을 가져왔다. 이것은 밴드가 이전과 달리 라디오 뿐 아니라 TV 중계로도 그들의 음악을 홍보하고, 비행기를 타고 미 대륙이나 유럽 대륙 전체 투어 일정을 맞출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였다.

여기에 1960년대 초반부터 런던에서 온갖 밴드의 기타 연주를 해오며 받은 돈으로 먹고 산 지미 페이지라는 청년이 있다. 그는 1960년대 음악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이 락 음악이라는게 상업적으로 잠재성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신과 함께 일한 여러 훌륭한 음악가들을 자신의 세션 밴드에 데려오고, 밴드 이름도 레드 제플린으로 바꾼다. 레드 제플린은 1969년 1집을 발매하기에 앞서 미국 전역을 순회하는 투어를 돌고, 덴마크와 독일, 프랑스에서도 라이브 공연을 한다. 또 영국과 미국의 거의 모든 TV 쇼에 출연해 밴드 앨범을 홍보하였으며 티셔츠도 팔았다. 그 결과, 1집이 발매되기도 전에 레드 제플린이라는 밴드는 너무 유명해져서 1집은 신생 밴드의 앨범 답지 않게 불티나게 팔렸다. 이들은 그런 방식으로 앨범이 발매되기 이전에 대륙 순회 투어를 돌고, TV 쇼에 출연하며, 언론사를 불러 자신의 앨범을 홍보하며, 거대한 스타디움에서 화려하게 공연하고, 공연이 끝나면 티셔츠를 파는 "기업체"에 가까운 음악적 행보를 보였다. 1971년 그들의 라이브 공연은 비틀즈가 종전에 세웠던 기존 최대 라이브 관중 수의 기록을 갱신했고, 4집은 4,000만장 가까이 팔려 현재까지 가장 많이 팔린 앨범 10위권 안에 들어간다.

 

레드 제플린, 최후의 히피 밴드이자 최초의 대중 밴드

여기서 중요한건 레드 제플린이 상당히 히피적인 밴드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1968년의 음악과 아주 크게 차이나는 음악을 하지 않았다. 재즈, 클래식 특히 포크송의 영향을 받았고(Going to California는 가장 히피적인 곡으로도 자주 선정된다), 동양 철학 같은 오리엔탈리즘 요소도 많이 사용했다. 곡의 주제도 판타지, 성적 유희, 마약 복용 등 기존 사이키델릭 전위 밴드의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쨌거나 이것을 토대로 상업화를 했다. 그들에게 오리엔탈리즘이나 호빗 같은 요소는 밴드의 특이성을 더해서 관객의 이목을 끄는 일종의 전략이었다. 과시적인 화려한 라이브도 이전에 지미 헨드릭스(기타 불 태우기)나 도어즈(무대에서 자위행위) 같은 1968년의 음악가들이 했던 관행이었는데 제플린은 이것을 보다 상업화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레드 제플린이 1967~1968년의 밴드와 달랐던 점은 분명히 이런 요소를 과감하게 대중화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이었다. 제플린은 그런 요소가 분명히 일반적인 20대와 그 외 세대에게도 에너제틱한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고 이것은 적중했다. 레드 제플린은 오늘날 음악의 상업화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밴드이다. 마이클 잭슨은 그 전에 레드 제플린의 성공이 선행하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크게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즉 1968년의 음악적 환경에 맞춰서 성공하려고 했던 밴드가 1980년대 음악 상업화를 이끈 측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건즈 앤 로지스가 레드 제플린을 따라한건 놀랄 일이 아니다.

 

이렇듯 음악 외적인 상황에 따라 변화한 1960년대의 밴드들이, 1980년대 음악가들에게 미친 영향력은 크다. 1960년대에 전위적인 음악을 하겠다면서 공연을 한바탕 크게 벌인 여러 밴드들이 1980년대 팝 음악의 공연 무대에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 전위 밴드들은 화려한 형형색색의 조명을 쓰고, 마이크를 던지는 등의 퍼포먼스를 벌였는데 이것은 대부분 마약에 취한 느낌을 대중에게 발산하고 싶어서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본 조비의 1980년대 음악가들은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밴 헤일런의 13분 기타 솔로 같은 것이 그 예시. 이런 것을 아레나 록이라고 하는데 1960년대 여러 음악가들의 퍼포먼스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된다. 테일러 스위프트가 대장정을 하고 있는것도 따지고보면 1960년대의 음악가들이 먼저 시도한 바.

​즉 1960년대의 음악가들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들이 1960년대의 음악외적인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 행동들은 1980년대 팝과 현대 음악의 관행에 토대가 되었다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1968년의 음악이 음악의 상업화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을 뿐더러 음악산업의 할아버지격 되는 위치에 있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결국, 락이 팝이랑 다르니 뭐니 하는 락 부심이란 부질 없다는 것이다.

 

저작권자 © 괜찮은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