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분야 언론기사를 보면 두 가지 특징이 보입니다.
괜찮은 뉴스도 이 범주에 들어가지 않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사실 창간목표도 아래에서 지적하는 기성교육언론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소위 전문가 정보의 전달자로서 역할을 하는 한계입니다.
이상무님, 임대표님, 김소장님, 오이사님등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런 취재원을 쓰지 않아도 될 정보임에도 전문가의 1성만 있지 한발 더 들어가는 정보나 데이터는 없습니다.
마치 수학공부를 잘 해야 된다면서 학습전문가 한 명 인터뷰하는 모양새입니다.
“언론은 뉴닉(NEWNEEK)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뉴닉은 시사를 알기 쉬운 말로 설명해주는 무료 뉴스레터로 최근에는 유튜브가 이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유튜브가 아닌 굳이 뉴닉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독자들이 떡밥기사나 선정적 기사에만 열을 올릴 것 같지만 사실은 정제되고 정리된 정보에 대한 욕구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두번째 한계는 더 분명합니다. 바꿀려고 하는 반론하는 태도의 부족입니다.
받아쓰기적 자세로는 법조계 출입기자단보다 더 한 태도가 교육뉴스매체들로 보입니다. 가깝게는 방역패스의 학원적용과 확진자 증가단계에서의 전면등교 고수에서 보이는 비일관성 비논리성에 항의하지 않는 것을 들 수도 있고 만시지탄인 통합수학 시행과 평가원의 출제오류에 대한 무반성을 지적하지 않는 태도를 들 수 있습니다.
당나라 말기의 고승 임제는 살불살조라는 큰 법어를 내렸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뜻입니다.
《임제록(臨濟錄)》의 그 앞 구절은 이렇습니다. ‘그대들이 참다운 견해를 얻고자 하려면 오직 한 가지 세상의 속임수에 걸리는 미혹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한 손에는 고교학점제를 들고 있고 다른 손으로는 정시확대를 할당하는 이율배반적 태도를 관상비평하듯이 받아적고 옮겨읊으면 안 됩니다.
취재원과 한 통속이 되어서 사정이 있겠지라고 봐주면 안 됩니다.
사정이 급박한 것은 수험생과 학부모가 더 합니다.
공복(公僕)이 나랏돈으로 송사를 벌이고 정보를 알려달라니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호통을 칩니다. 이상한 형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