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꾹 참아 나가는 거예요.  남들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기로 해요.앞으로도, 늙어서도, 그러다가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우리의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여요. 그리고 무덤 너머 저 세상으로 가서 말하기로 해요. 우리의 삶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우리가 얼마나 울었고 슬퍼했는지 말이에요. 그러면 하느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실테죠. 아, 그날이 오면, 사랑하는 아저씨, 우리는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될거에요. 그곳에서 우린 쉴수 있어요."
                   (바냐아저씨에서, 안톤체호프)

2010년대 이후로 가장 주목받는  일본영화계 신예감독이 하마구치 류스케입니다.

2022년 79회 골든 글로브 외국어 영화상 그리고 제56회 전미 비평가 협회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을 수상한 작품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입니다. 21년 칸 영화제 각본상도 받았습니다.

이런 대단한 영화지만 우리나라에서는 7만6천명만 관람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극찬에 더해서 봉준호감독의 극찬도 얻어져서 영화는 안 봐도 리뷰는 보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대체로 이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소개할 때  원전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이라는 말도 덧붙입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라는 제목은  비틀즈의 곡 "Drive My Car"에서 따왔다는 것도 붙이구요

OST입니다.

 

그러나 영화<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고나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를 느끼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루키의 소설은 이 영화의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자 소재로만 사용되었지 영화는 무엇을 원작으로 했다고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주목받는 이유도 이렇게 자신의 영화를 위해 기존의 전통적인 미디어 콘텐츠를 얼마나 능청스럽게,  심지어 미학적으로 잘다루어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원작은 있되 원작과 무관하게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독창적이고 새로운 예술적 창작물이라고 얘기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앞서 시작을 체호프로 다뤘던 것처럼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이 영화에서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를 러시아의 문호 안톤 체호프의 희곡 <바냐아저씨>를 이용합니다

이토록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기존의 콘텐츠들을 차용하며 영화에서 재현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는 오프닝 시퀀스가 무려 40분나 됩니다.

프롤로그라 하는 이 오프닝 시퀀스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바로 오토가 남편인 주인공  카후쿠에게  끊임없이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토의 상상속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오토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오프닝 시퀀스를 마무리하고 그 뒤에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오토가 그동안 들려주었던 이야기는 이제 영화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모티브이며 바로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메세지를 재현하는 첫번째 도구입니다.

카후쿠와 오토는 사랑했던 어린 딸을 잃고나서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아픔을 묻어두는 방식으로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치유되지 않은 채 묻어두었던 상처는 일상에서 다른 모양으로 소환되어 오토는 외도로, 카후쿠는 모른척함으로 또다시 자신과 상대방에게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 냅니다.

상처는 굳은 것이 아니고 덧이 난 것입니다.


오토가 죽은후 카후쿠는 히로시마에서 하는 연극제의 총괄 감독으로 가게되고 그곳에서 자신의 차를 운전해 주는 미사키를 만나게 됩니다. 미사키 역시 성장기 내내 엄마와 관계로 부터 생긴 상처를 내면화 한 채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오토의 죽음과 함께 카후쿠의 주변에  주요하게 등장하는 인물인 배우 다카츠키는 사실 오토의 불륜의 상대였으며 역시 내면의 상처를 한가득 안고 살아가는 젊은이 입니다.

감독은 이렇게  상처라는  주제에  깊이 천착하고 있으며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통해  끊임없이 재현에 재현을 거듭합니다.

 연극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히로시마라는 공간과 이 연극에 등장하는 다양한 국적의 배우들, 장애인고 비장애인이도 상처의 재현인 셈이죠

 연극제가 열리고 있는 히로시마는 일본이 전쟁의 댓가를 혹독하게 치루어야했던 공간이며 연극제에 참여하는 배우들의 국적이 일본, 한국,중국 이라는 사실 역시 전후 동아시아가 전쟁의 상처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안타까운 현실을 보이는 것입니다.


결국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인간이 인생을 살아가며 어쩔수 없이 생기게 되는 상처에 대해 우리는 어떤 식으로 상처를 마주할것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앞서 체호프의 희곡 바냐아저씨에 나오는 마지막 대사는 영화의 후반부에도 똑같이 등장합니다.  이 대사는 희곡속에서  상처받은 바냐아저씨와 자신을 위해 소냐가 바냐아저씨에 읊조리는 대사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희곡은 뚜벅뚜벅 걸어나와  카후쿠와 오토가, 미사키가, 다카츠키가, 상처를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치환됩니다.

안톤 체호프는 사실주의 문학의 정수라 불리며 일생동안 삶의 아이러니와 위선과 위악의 인물군상을 희극적으로 다뤄온 작가입니다. <바냐아저씨>의  나오는 이 마지막 대사는 결국  상처받은 인간들을 위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아직도 진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우리가 내딛어야하는 첫 발걸음도 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한 역설적 화법은 아니었을까요?

 

즉 어떻게 참아나가느냐가 아니고 아직 시작도 아니에요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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