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80년도 더 전의 사람인 히틀러를 다룬 책이 역주행차트처럼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올해 4월에 나온 책 "히틀러를 선택한 나라"는 결국 역사를 빌려서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었길래 인기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의 부제로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졌는가가 아닌 

" 분노와 오판이 부른 어느 나라의 민주주의 위기를 되돌아보며" 라고 붙이고 싶습니다.

책은 히틀러를 다루기보다는 히틀러가 집권가능한 환경이 된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태를 다룹니다.

저자인 미국 역사학자인 벤저민 카터 헷은 이번 책에서  1930년대 초 독일의 민주주의 위기를 탐구하면서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과 원인을 돌아보고 1930년대와 오늘날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의 책 3종세트는 《히틀러와 맞서며》 《국회의사당 불태우기》그리고 이번 책 《히틀러를 선택한 나라》 라 하겠습니다.

 

책 속으로

“이렇게 대단한 문명국에서 640만 명의 유권자들이 가장 천박하고, 공허하고, 상스러운 협잡꾼을 지지했다는 사실이 무시무시하다.”

나치가 승리한 1930년 총선 직후 한 신문이 내린 평이다.

당시 독일의 소위 자유주의자들은 다른 나라들이 독일에 재앙이 닥칠 것이라 판단해서 일어나게 될  외교ㆍ금융 여파를 걱정했다. 

 

현실적으로 뭘 하겠다는 건지 모를 선동가의 발언에 현장의 농민들은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사람들 대부분은 당시에 뭔가 정치적이지 않은 정치를 원했다. 통합과 부흥을 부르짖으며 정치와 민주주의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게 보일 수 있었다. 히틀러와 나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의 사람들을 설득해 냈다. 

 

 모든 사회와 민주주의에는 분열이 있다. 계층, 지역, 종교, 성별, 민족 사이의 분열이다. 분열된 집단이 궁극적으로 서로 타협하려고 하지 않는 한 어떤 민주주의도 길게 지속될 수 없다. 그렇지만 두 가지 중요한 요인 때문에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분열된 집단들이 타협하기가 어려웠다. 한 가지 요인은 구조적이었다.각자의 경제적인 이익에 따른 분열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 체제에서는 각각의 이익집단을 위한 정당이 있었고, 정당들은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만 영향력을 행사하고 법률을 제정하려고 했다. 다른 집단 사람들(노동자나 고용주, 농민이나 기업가)은 알 수 없는 이방인이었다. 각 당은 어떤 경우에도 뚜렷이 구분되는 집단을 대표했다. 그래서 정당들은 ‘경계를 뛰어넘으려는’ 의욕이나 능력조차 별로 키운 적이 없었다

---「3장 피의 5월」중에서

 

바이마르 민주주의 붕괴의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저자는 “배타적인 음모론과 비합리성에 치우치는 문화 속에서, 거대한 반정부 운동이 엘리트들의 복잡한 이기주의와 결합한 결과”라고 짚는다. 지금 우리에게까지 이어지는 문제의 본질은 무엇일까? 독자들이 오늘날의 상황과 명백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을 수 있을까?

 

히틀러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쿠르트 폰 슐라이허, 프란츠 폰 파펜 등의 기성 보수 정치인들이 오판하지 않았다면 총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1930년대부터 이들은 대통령의 총리 임명권과 비상명령을 이용해, 의회 다수당 지도자가 아닌 자신들이 간택한 사람들을 총리로 세우며 집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귀족 출신이었던 집권 우파 정치인들은 변변찮은 세관원의 아들이었던 히틀러를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모국어 문법조차 틀리고 4년간 군 복무에도 일병 진급에 그친 히틀러는 그들 눈에 국가지도자를 해낼 인물은 아니었다.  1933년,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히틀러를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로 임명한다. 히틀러 정권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조건으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기성 보수 정치인들의 오판과 오만함과 함께 출범했다. 

히틀러의 과격한 언사를 모두가 알았지만 1933년 집권 직후에는 유권자의 표를 구하던 때와는 달라지지 않을까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다. 내각에서 11명의 장관 중 3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자리는 여전히 기성 보수 정치인들이 차지했고, 대통령·군대가 있으니 히틀러가 경거망동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33년 총리로 지명된 히틀러가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영접하고 있다.
1933년 총리로 지명된 히틀러가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영접하고 있다.

그러나 히틀러는 연립내각의 총리에 취임한지 27일만에 일어난 국회의사당 화재를 빌미로 언론·집회의 자유와 신체의 자유를 단번에 없애기 시작했고, 국회의 입법권을 정부에 위임하는 수권법을 통과시키게 해 권력을 거침없이 장악하기 시작한다.

 당시 총선에서 나치는 44%의 지지를 얻었으니 과반이 못 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반대파 정당을 불법 탄압하고 우파 정당들을 협박한 히틀러는 의회를 통하지 않고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전권위임법을 통과시킨 것이다.

 

히틀러가 노골적으로 폭주한 시발점인 의사당 방화를 둘러싼 나치의 선전·선동에 독일 국민들이 속아넘어간 것이 시작점이었습니다. 가짜뉴스와 악의적인 선동에 휘둘리는 나라의 미래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이미 1950년대에 같은 이름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를 낸 순수법학자 한스 켈젠은 

민주주의의 본질이 가치의 다원성과 상대성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서로 타협하는 데에 있다는 고전적 정의를 내렸습니다. 불과 10여년사이에 타협이라는 말은 이상적이거나 더러운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켈젠의 고민은 바로 우리시대의 고민과 마찬가지입니다.

첫째, 민주주의 체제 내의 정당한 반대자가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민주제도를 악용하려는 세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들과 타협할 수 있을까. 타협가능한 민주주의의 경쟁자와, 타협불가능한 민주주의의 적을 어떻게 판별할 것인가. 그것에 실패해서 나치 집권의 대참사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사람들로 하여금 극단적 주장, 가짜 뉴스, 혐오·증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차별과 희생양 만들기와 극혐적 표현에 사람들이 쉽게 유혹되는 구조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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