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훈의 pick

이기호 작가의 소설은 윤리적입니다. 그런데 슬프고 무겁습니다. 미시층위 같은 수사 빼고  한발짝 더 들어가보면 우리는 누구의 입장에서 착하다고 하는 것일까요?

이기호 작가는 1999년 단편 소설 『바니』로 등단한 이후 기발한 상상력과 구어체를 사용한 독특한 서술방식을 무기로 능청스럽고 해학적으로 현실의 문제들을 다룬 소설들을 발표하였습니다.

그의 소설이 다루는 해학성은 우리 문학의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흥부전을 예로 들자면  '놀부'가 풍자의 대상이라면, '흥부'는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동정심 연민의 대상이 됩니다.  해학은 우리가 왜 연대하지 못하는 가를 다룬다는 점에서 더 대안적이고 실천적입니다.

 이기호 작가는 그의 작품에 꾸준히  우리 사회의 이름 없는 사람들이 겪는 웃지 못할 억울한 사연들, 관찰자로서 주인공이 느끼는 심리적 압박과 죄의식, 개인의 삶과 사회적 현실이 연결되는 맥락에 대한 윤리적 상황, 이웃과 타자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통해 쉽지 않지만 우리가 일어나야 된다고 깨우칩니다.

그런 점에서 이기호 작가로 대표되는 2000년대 이후의 우리 소설은 그전까지의 소설이 갖고 있는 점잖은 실존주의적 얌전함과 차별됩니다. 00년대 이전의 우리소설은 비극적인 역사의 현실 앞에 놓인 개인에 대한 탐구 혹은 삶의 부조리함과 개별적 존재의 실존적 고통 혹은 내면의 심리를 다룬 소설들이었습니다.  실존적이기는 한데 대안부재라는 점에서 실천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을 대목이 분명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작가가 그의 입장이 되어봤는 가에 대한 아쉬움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부터 한국 소설은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허울뿐인 민주적 질서속에 IMF라는 생존적 불안정이 버무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화는 도둑이 법질서를 이용해서 교묘하게 약자를 수탈하고 있고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부조리한 금언에서 가치관의 혼돈과 인간의 욕망에 절망하게 되는 시기를 만들었습니다.

이제 문학은 훈장질을 벗어나서 제대로 인간의 윤리성에 대해 탐구할 책임감을 갖게 된 것입니다.

아래부터가 송지원 님의 서평입니다.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미시 층위에서 문학이 윤리와 무관했던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그것이 진정한 문학이라면 “지푸라기 하나에서도 큰 싸움을 찾아내는(『햄릿』 4막4장)일을 늘 해왔다.’(2008,18)

신형철 평론가 그의 비평집 『몰락의 에티카』에서 문학이 다루는 윤리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소설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은 2015년 발표된 단편 소설이다. 작가이자 대학교수인 화자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앞에서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채업자의 어머니를 상대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권순찬씨와 권순찬씨를 대하는 아파트 주민들의 입장과 태도의 변화를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느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한국은 전세계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속도의 외형적 성장을 이뤘다. 동시대 한국에서 살았던 수많은 사람의 생애 역시 이 놀라운 성장을 목도했으며 그들의 삶은 그 흔적의 집합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설은 허구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안은 현실과의 최소 접점 혹은 그 이상을 담보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어쩌면 한국의 변화무쌍한 현실은 한국 소설의 성장을 위한 좋은 환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한국 소설은 종전 이후 전쟁의 상흔을 짙게 드리운 분단국가라는 정치 사회 조건을 필두로 초도고 성장과 과학기술의 발달이 야기하는 현대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반영해왔다.


 

-이름 없는 사람들에 대한 주목
소설에 등장하는 권순찬은 어린 시절 다리가 아프다는 말을 믿지 않던 아버지로 인해 결국 다리 한쪽을 절게 되고 성실하게 살고 있지만, 일용직을 전전하며 고단한 삶을 이어간다. 그런 그에게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던 새어머니가 생활고로 지게 된 사채빚을 부탁하자 즉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끝내 권순찬은 사채업자에게 어머니의 빚을 입금했고 이후에 어머니 역시 그 사채빚을 어렵게 모아 갚고서 세상을 떠난 사실을 알게 된다. 권순찬이 돈을 돌려받기 위해 사채업자의 주소지인 화자의 아파트에서 찾아오지만, 그곳에는 어렵게 생활을 이어가는 사채업자의 노모만 살고 있을 뿐 사채업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결국 권순찬은 사채업자를 만나기 위해 아파트 입구에서 1인 시위를 하게 된다. 돈을 받고 싶은 권순찬의 입장이나 그 돈을 돌려줄 책임은 없지만 자식 일이기에 부채감을 갖게 되는 사채업자 어머니의 입장이나 딱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는 매한가지다. 이기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렇게 하나같이 억울한 사연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삶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살다 보니 우연히 억울한 사연 하나가 생긴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 자체가 억울함의 결정체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관찰자로서의 주인공이 느끼는 심리적 강박과 죄의식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인 주인공은 작가이며 교수지만 오랜 기간 글 쓰는 일에 집중할 수 없다. 그는 부인과 어린아이들을 서울에 둔 채 홀로 지방에 내려와 지방대학의 부교수로 일하며 학생을 가르치는 일 외에 교내 다양한 행정적 일들도 처리하며 지낸다. 그는 저항감 없이 수동적으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자신에게 일정한 무력감과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감을 느낀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겁을 잔뜩 집어먹은’ 권순찬은 ‘힘없이 흩날리는 눈송이’, ‘먼지 뭉치’처럼 무력하게 자신의 억울함을 소명하고 있다. 주인공 화자는 권순찬을 불쌍하게 여긴 동네 주민들이 선의로 모은 돈을 끝내 거절하고 시위를 이어가는 권순찬에게 자제력을 잃고 화를 낸다. 동네 주민들을 괴롭히지 말라며. 그러나 그 화는 동네 주민들의 선의, 즉 권순찬을 불쌍히 여기고 안타깝게 생각하며 권순찬이 시위를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던 동네 주민들의 선의를 무시한 권순찬에 대한 화였을까. 어쩌면 그는 다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하고 싶었던 세상의 이치, 화는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도 힘들기만 한 세상, 원칙을 지키고 순리대로 살고 싶은 마음을 조롱하듯 반칙과 부정이 이겨 먹는 세상, 그 부당하고 부조리한, 그 세상의 이치가 가감 없이 드러나는 존재가 바로 권순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개인의 삶과 사회적 현실이 연결되는 맥락에 대한 윤리적 성찰
아파트 주민들의 선의를 거절한 권순찬이 결국 주민의 신고 때문에 노숙인 쉼터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끌려간 후, 주인공 화자는 어느날 우연히 권순찬이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사채업자를 보게 된다. 윤기 나는 외모에 외제 차를 끌고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한 손에는 쇼핑백을 들고 자신의 엄마가 살고 있는 집을 찾아온 사채업자를. 그리고 주인공 화자는 질문한다. 왜 우리는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지에 대해서... 

 

-이웃과 타자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심화
권순찬은 다른 사람의 돈이 아니라 사채업자를 만나 직접 일을 해결하고 싶다고 거절한다. 권순찬의 안타깝고 억울한 사연과 무해하고 무력한 그의 시위에 대한 선의로 시작한 아파트 주민들의 모금은 권순찬의 일고의 여지가 없는 거절로 갈 곳을 잃는다. 권순찬이 시위를 멈추고 떠나기를 바랐던 그 선의는 당황한 채 씁쓸하고 서운한 마음으로, 화의 마음으로 변한다.
이기호 작가는 권순찬의 거절과 권순찬을 도우려던 아파트 주민들의 착한 마음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아파트 주민들의 선의는 왜 권순찬을 이해할 수 없었는가. 분명 착한 마음으로 시작한 선의라도 거절된 선의는 왜 더 이상 선의 모습을 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진짜 선의였는가. 선의는 무엇인가.
문학이 태동한 이래, 특히 소설은 윤리와 무관했던 적이 없다. 거대 담론으로써의 윤리던, 일상의 생활 작은 윤리던 소설은 늘 윤리적 딜레마, 윤리적 올바름에 대해 질문한다. 그런 점에서 이기호 작가는 우리에게 가장 21세기 스러운 윤리를 묻고 있는지 모른다. 선과 악의 이분법이 아닌. 옳고 그름의 잣대가 아닌. 사실 누구도 답하기 어려운. 그러나 누구라도 한 번쯤은 고민해봐야 하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세상에 대한 다양한 윤리의 잣대와 그 방향에 대해서. 비록 그 윤리가 ‘윤리’ 인 듯 ‘윤리’ 아닌 ‘윤리’ 같은 윤리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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