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통적으로 생각하는 나쁜 죽음은 가족을 곁에 두지도 못한 채 병원에서 말 그대로 '숨만 붙여 놓는' 연명의료를 받다 감염 등에 따른 합병증으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이런  무의미한 연명의료 없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원하는 곳에서 맞는 죽음은 웰다잉 '좋은 죽음'으로 꼽지요.

코로나 감염격리로 인해  요양병원에서 홀로 죽음을 맞는 삶이 오는 것을 알지 못하던 2019년  정소현 작가의 '품위 있는 삶'은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흥미로운 반전과 날카로운 현실 감각을 선사하는 정소현 작가의 단편 여섯 편이 수록돼 있는 소설집으로 심사위원들은 "치밀한 구성과 밀도 높은 문장 안에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냈다"고 평가했습니다.

1975년생인 정소현 소설가는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양장 제본서 전기'가 당선돼 작품활동을 시작해서 . 2010년과 2012년 젊은작가상, 2013년 김준성문학상을 수상한 어느덧 등단 14년을 맞는 중견작가입니다.

책이 벌써 나온지 3년이 되었는 데 책을 읽으면서 작년에 본 안소니 홉킨스의 영화 더 파더가 생각났습니다.

안소니 홉킨스가 80세가 넘은 나이에 너무나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 영화 <더파더> 역시 치매에 걸린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입니다.

"내 잎사귀가 다 지고있는것 같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통 모르겠다"

 요양원 간병인의 품에 안겨 엄마가 보고싶다며 울먹이는 안소니 홉킨스의 모습은 심지어 공포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감독의 마지막 앤딩 클로즈 장면은  화창한 햇살아래 살랑거리는 짙푸른 이파리들의 생생한 모습이었습니다.

모든 기억과 자신마저 잃은채 소멸되어 가는 노인의 삶과 대조적이죠

저는 이 장면은 감독이 무력하게 소멸해가는 모든 존재- 잠시라도 짙푸른 생의 에너지를 응집하고 분출한적이 있었던 -에 대한 애틋함을 담은 장면으로 해석하며 위로를 받았습니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 것은 오래 안 가잖아요 - 영화 더 파더에서
날씨가 이렇게 좋은 것은 오래 안 가잖아요 - 영화 더 파더에서

여든이 넘은 시어머니는 일흔살이 넘어서도 경제활동을 하셨습니다. 은퇴를 하시고 더이상 수익을 내기 위해 온갖 구상을 하지 않아도 되고 화장을 하고 옷을 챙겨입지 않고 퍼질러 있어도 된다며 좋아하셨지만 이내 자신이 쓸모없는 잉여의 존재같다며 우울해 하셨습니다. 요즘은 여기 저기 자꾸 아픈 몸때문에 그런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자주 말씀하십니다. 나의  노년의 삶을 생각하게 하죠. 

 

 

이제 진짜 정소현 작가의 품위있는 삶 110세 보험으로 가겠습니다.

 '품위 있는 삶, 110세 보험'

<품위있는 삶-110세 보험>을 추천합니다. 집에서 편안하게 노후를 보내고 집에서 죽음을 맞을 수 있는 보험. 어쩌면 지금은 없어진 상품일도 모르지만, 누군가 권유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꼭 가입하세요.

제가 이 보험에 가입했던 삼십년 전만 해도 이것이 제 인생에 어떤 역할을 할지 상상도 못했습니다. 일반 회사원의 급여 정도 되는 납입금을 퇴직하기까지 이십년간 매달 냈습니다. 저는 전문의가 여덟명 정도 되는 여성 전문 병원의 대표 원장이었고, 돈을 쓸 시간도, 무언가를 싶이 생각할 시간도 없이 바빴기에 쉽게 가입할 수 있었어요. p.245

매일 아침 요리사가 집으로 방문해 제 입맛에 맞고 영양이 풍부한 두끼 식사와 간식을 준비해주고 돌아갔습니다. 늘 진료실에서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던 저에겐 엄청난 선물처럼 느껴지는 음식들이었습니다. 가끔씩은 보험사에서 마련한 브런치 모임에 초대되어 명사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VIP를 위한 디너 모임에 초대되어 한때 대단했지만 지금은 그냥 노인인 사람들과 교류를 하곤 했습니다. 그 솜씨 좋은 요리사가 십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오고 있으니 저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p.247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며 늙는 것이 너무 비참하고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저에게 닥쳐오니 다른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아무 일 하지 않고 조용히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불안과 고독 때문에 야간 진료와 응급 분만을 도맡아 했던 날들, 밤마다 회진을 돌고 보조 침대에서 쪽잠을 잤던 날들, 선생님은 언제 밥을 먹고 언제 자느냐는 물음에 웃음으로 대답했던 날들을 생각하면 지금은 천국과도 같습니다.p.249

가장 좋은 것은 이제 더이상 걱정해야 할 노후가 없다는 겁니다. 늙는 일 뒤에는 더 늙는 일이 기다리고 있고, 병과 죽음이 잇따라 찾아오겠지만, 마지막까지 보험사에서 도와줄 거라 생각하면 나름 버틸 만합니다. 몸이 불편한 다른 노인들처럼 국가에서 무상으로 지원해주는 실버타운에 들어가 낯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불편해하지 않아도 되고, 노인 병동에 누워 생을 마감하지 않아도 된다니 안심입니다. 죽으면 다 끝이라지만 죽기 전까지는 제가 좋을 대로 하고 싶어요.p.249-250

예전 같았으면 사진 찍힐 일도 없었을 거고, 그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지도 않았겠죠. 어차피 내 얼굴은 나도 못 알아볼 정도로 늙었고, 하루하루 더 늙어가고 있고, 언젠가는 사라질 얼굴입니다. 그나마 오늘이 가장 젊은 얼굴일 테니 사진을 찍어두어도 괜찮을것 같습니다. 젊었을 때 사진 찍히는 것을 유난스럽게 싫어해던 걸 후회하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얼굴들을 잡아두는 방법이 사진뿐이라는 것을 왜 몰랐을까요.p.253

어쨌건 다시 돌아와서 아들 이야기를 하자면, 제길, 그 나쁜 녀석은 제 자식도 내팽개치고 에미가 걱정하든 늙든 병들든 관심도 없는지 오랜 세월 잠적했던 후레자식입니다. 나는 그 애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어딘가에 살아 있다면 결국 만날거라고 생각했어요.p.253

그런데 요즘 며칠째 붙어살다 보니 아이를 키우면서 혼자 있고 싶어 했던 날들이 떠오르곤 해요. 그때는 노인이 되어 외로워지면 시끌벅적했던 그날이 그리워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견뎠거든요. 하지만 이제와서 보니, 난 그때나 지금이나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람이었어요.p.261-262

진짜 정말 이상해서 내가 자꾸 말하는데, 오늘따라 내 기억력 상태가 아주 좋아. 건강한 젊은이의 심장처럼 펄떡펄떡 뛰는 내 머리통은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어. 그런데 무슨 소린지 다는 이해가 안가. 이해한다 한들 기억 못하는 날도 있고 오늘처럼 기억은 하지만 이해가 안가는 날도 있는 거겠지 뭐. 나는 그냥, 태어난 나와 죽을 나, 맞닿은 두 지점 사이에 접혀 들어가 삭제된 시간 속에 있는 거야. 과거의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미래에 대해 무슨 약속을 했건 그건 잘 모르고 한 개소리야. 내가 살아보지도 않은 시간을 어떻게 알고 그랬겠어. 모르니까 무서웠던 거지. 그 알지도 못하는 것 때문에 도대체 난 인생을 얼마나 허비한 거냐. 그러니까 제발 나 좀 살려줘. 이쁜 내 새끼들아.p.280-281
 

정소현 작가는 한국일보 문학상을 받고 인터뷰를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어가는 존재이고 결국 헤어질 것이며 모든 건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에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지금도 삶의 바닥에 그 공포가 깔려 있습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유 중 하나도 이런 시간을 어떻게든 맘대로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죠. 일종의 정신승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다행인 것은 삶의 고통도 사라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우리가 모두 죽어가는 연약하고 애틋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와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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