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 국민일보 --- 정지아는 1990년 《빨치산의 딸》을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나 국가보안법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판매금지 조치를 당했고 2005년이 되어서야 복간되었다.
사진출처 : 국민일보 --- 정지아는 1990년 《빨치산의 딸》을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나 국가보안법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판매금지 조치를 당했고 2005년이 되어서야 복간되었다.

작가님, 농사지으신다면서요? 작가라는 호칭에 그녀는 순간 당황했다. 작가라는 호칭을 들어본 게 얼마만인가. 물론 작가긴 했다. 그녀가 등단한 건 이십여년 전, 신춘문예로 화려하게 등단한 뒤 간간히 단편을 썼고, 세권의 소설집을 냈다. 신간 출판 즈음이면 중앙일간지와 인터뷰도 했다. 그러나 책은 팔리지 않았고, 상상력은 나이와 반비례하여 쏜살같이 사라졌으며, 엄마를 모시겠다고 지리산 자락에 묻힌 이후로는 세간의 관심도 문학적 상상력도 함께 묻혔다.

(정지아의 단편 자본주의의 적p.47)

박사님, 이것 짬 보씨요. 박사님 나왔소. 거기 고구마를 건네는 송씨 아주머니 앞에서 어리둥절한 그녀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사진보다 기사 타이틀에 몸이 굳었다. 진정한 작가, 진정한 소확행. 아름다운 은둔자 문학박사 정지아.(같은 책 p.74)
 

 

 출판인이 〈시사IN〉에 추천한 올해의 책 상위 10권 중 문학 분야가 절반을 차지했다. 최근 몇 년간 출판인의 추천은 에세이나 사회비평서 위주였고 문학작품은 소수에 그쳤는 데 올해는 달랐다. 

출판인들의 압도적 추천을 받은 책은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다. 딸의 시선에서 ‘전직 빨치산’ 아버지의 장례식 3일을 다뤘다. 남로당 출신 부모의 삶을 기록한 〈빨치산의 딸〉 출간으로 판매금지 조치를 겪었던 작가가 32년 만에 낸 장편소설이다.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꼽은 출판인들은 무겁지 않게 풀어낸 작가의 유머 감각을 높이 샀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는 “굳은 신념과 모순이 뒤섞인 빨치산 아버지의 생애를 비극적이기보다는 유머러스하고 감동적인 필치로 그려낸 솜씨가 탁월하다”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아버지에게 거리감을 가지고 있던 딸이 아버지를 이해해가는 과정에도 주목했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한 일생의 삶을 마감했다. 딸이 보기에는 너무 진지해서 웃겼던 집안이었다. 사회주의자답게 의식만 앞선 농부인 아버지는 국졸에다 농사엔 젬병이었고, 어머니와 더불어 물정 모르는 유물론자였다. 노동절 새벽에 순천의 종합병원에서 아버지는 그렇게 82세의 일기를 마쳤다. 장례식장의 공동 사장 3명 중 한 명인 황 사장은 사회주의자이며 여순사건 직후 사망한 황수길의 아들이다. 전기고문 후유증으로 사시였던 아버지는 영정사진에서도 단호한 모습인데, 병원에서 임신 불가 판정을 받았지만 최 한의사가 준 약을 먹고 40세의 엄마에게서 나를 낳을 수 있었다. 아버지 영정사진은 작년에 아버지를 삼촌으로 모셨다는 민노당원 박동식 씨가 찍은 것이다. 

어릴 때 너무나 친하게 지낸 큰 집 길수 오빠는 지금 위암 말기이다. 빨갱이 작은아버지(내 아버지) 탓에 육사에 합격하고도 입학을 못 했다. 군대 제대 후부터 멀어진 그는 연좌제가 풀리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인생의 마지막 조문을 하고 있는 셈이다. 사촌들도 도착하여 상복을 입고, 떡집 언니는 노련하게 조문 상차림을 준비한다.

 

음치였던 아버지에게 처음 배운 노래가 '클레멘타인'이었다. 그 노래의 배경지식을 알면 제대로 부를 수 없는 노래다. 딸은 잃은 아버지의 마음, 왜 아버지는 그 노래를 처음 내게 가르쳤을까. 아버지와 베란다에서 같이 피운 담배맛은 내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담배맛이었다. 나보다는 훨씬 훌륭한 아버지의 자식이 학수였다. 아버지를 화장했다. 천 개의 얼굴을 가진 아버지는 그렇게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유골함을 안고 작은아버지는 통곡한다. 9살에 어긋난 형제가 70년이 지나 화해를 하는 셈인가.

 

 

아래는 작가를 오래 지켜본 오창은 중앙대 교수의 서평입니다. 일부 발췌입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10년 넘게 궁리하고 애써 쓴 역작이다. 힘을 들이면 무거워지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경쾌한 깊이’로 발랄하게 빛난다. 전직 빨치산이자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였던 ‘고상욱’의 장례식이 소설의 중심 서사다. 대학 시간강사인 딸 ‘고아리’가 문상객들을 맞으면서 ‘몰랐던 아버지의 삶’을 하나하나 발견해나간다는 이야기다. 고상욱은 견고한 이데올로기 중심주의자처럼 보였고 딸 아리의 인생을 망쳤던 사람으로 보이지만  하루하루 장례를 치를수록 다채로운 모습으로 바뀐다. 미스터리적 기법을 활용하면서도, 훈훈한 민중주의적 정서를 보듬은 소설의 서사가 몰입도를 높여준다.

 이 소설은 3일 동안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1948년부터 1952년, 1980년대 초중반, 그리고 21세기 초반의 시간이 공존한다. 장례식장에 구례사람들이 고상욱을 추모하기 위해 모여들면서 각자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감사, 회한, 원망, 분노의 감정들이 뒤섞여 용광로처럼 들끓는다. 

 

소설가 정지아는 “이데올로기적 상처를 그 이데올로기를 이해한 순간에 넘어섰다고 생각했는데, 살아보니까 아니더라고요. 이를테면 멀리서 바라보지 못한 거죠”라고 했다. 이해를 전제로 한 당위적 포용은 더 많은 상처를 불러올 수 있다. 오히려 불편한 마음을 감수하는 거리 두기가 더 나은 미래의 삶을 위해 꼭 거쳐야만 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거리 두기의 감각이 살아날 때,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보내기’의 과정은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작가와 대상의 거리 두기가 가능했기에 도달할 수 있었던 빛나는 문학적 성취다. 특별한 것처럼 보이는 개인의 삶도, 거리 두기를 통해 민중의 삶으로 보편화하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멀리서 봐야, 그제야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이 있다. 

 

조창훈의 pick

아버지의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 둘이 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나를 감쌌다.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해방일지 중에서

 

작가는 사람을 사람답게 하지 못하는 모든 것에 저항해야 한다는 정도의 생각은 갖고 있습니다만 그걸 신념이라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네요. 순정, 의리, 염치, 뭐 이런 단어들도 좋아합니다. 인간이 염치 챙기고 순정한 마음으로 의리 지키고 살면 족하지 않은가 싶기도 하구요.            정지아 작가의 창비 인터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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