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더 이상 공장이나 병영 교도소는 아닙니다.

학교는 규율사회가 아닙니다. 그런 학교였다면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굳이 오늘날의 우리학교를 명명하자면 피트니스 클럽,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이 더 잘 맞을 것입니다

그곳은 서슴치 않고 A와 C를 역량이라는 이름으로 비교 평가합니다.

같은 등급도 다른 등급이라고 더 세분화합니다.

그 속에서 학생에 대한 존엄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측정만이 있으니 피트니스클럽입니다.  수 많은 대학과 수 많은 학과는 등급 누백으로 위 아래가 매겨진 쇼핑몰입니다.

학교도 당연히 구분됩니다. 마치 유전자 샘플실 같은 것입니다.

학생은 더 이상 "복종적 주체(Gehorsamssubjekt)"가 아니고 이제는 "성과주체 (Leistungssubjekt)"라고 불립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해야 하는 기업가이고 이 사회는 협업과 소통능력, 나눔과 배려와 같은 공동체 역량도 교사 혹은 동료의 평판을 통해 기록물로 관리합니다.

70- 80년대에 규율학교를 다녔던 부모세대는 성과사회로 변모하면서 일어난 심리적 · 공간적 변화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사회의 통제는 정부나 교사 또는 부모에 의해 이뤄지지 않습니다.

지각을 하지마라와 사람을 때리지 마라와 같은 부정성의 금지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제는 보조적입니다. 그보다는 중심적인 동사는  ~해야 한다 입니다.

수 많은 공 사교육 설명회에서 학부모는 무엇을 해야한다(더구나 언제까지)를 듣고 옵니다. 성과사회의 강제성은 해야한다입니다.  그리고 보다 상업적인 선동어구는  '할 수 있다' 입니다.  그렇다고 "예스 위 캔"도 아닙니다. We가 아닌 I 나 YOU 이어야 합니다.

규율사회가 범죄자를 낳는다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은 생산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사회의 기획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속에서 성취를 최대화하고자는 개인의 열망이 증폭시킨 것입니다.

 생산성이라기보다는 수익의 향상을 위해서 규율은  '성과'  그리고  '할 수 있음' 으로 대체되었고 능력있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착한 사람보다 우위에 있게 되었습니다. 착한 아이로 자라기보다 능력있는 아이로 자라기를 원하는 부모에 대한 설문조사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능력을 위한 노력은 더 강하게 당위가 되어서 단련은 기술이 됩니다. 규율이라고 하지 않는 데 명령보다 더 심한 내면화가 됩니다. 규율과 성과는 완전한 단절이라기보다는 연속적 관계가 성립합니다.

 

푸로작은 대표적인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억제제 계열의 항우울제로 플루옥세틴 이라는 명칭보다는 브랜드명인  푸로작으로 (Prozac)이라는 명칭으로 더 유명합니다(우리나라에서는 수입사 한국릴리가 푸로작이라고 이름붙여서 판매를 합니다). 프로작 개발사인 일라이 릴리(Eli Lilly) 사는 글로벌 시총 1위 제약사입니다.

항우울제의 부작용은 위장장애, 변비, 입 마름, 소화불량 수면장애 등으로 알려져 있지만 가장 큰 부작용은 내가 그전의 나같지 않다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는 점입니다. 항우울제는 슬픔을 덜어주지만 즐거움마저 앗아갑니다.

사회학자 알랭 에랭베르는 우울증이 증가하는 이유를 사람들이 갈등 관계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성과와 최적화를 중시하는 문화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갈등 처리 작업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도 성적을 위해서 부모와 자식은 갈등회피작업을 합니다.

갈등을 잠복시켜서 처리해야 될 갈등을 회피하는 성과유일 사회의 단적인 구호가 이것입니다.

우울증은 새로운 비정상입니다. 우울자는 되어야 할 자기 자신에 대한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끝내 지쳐버린 사람입니다

정신적 · 육체적 지적 본성을 조작해서 다양한 노력을 통해 우리의 한계를 극복- 사실은 한계를 밀어버리는 이러한 조작은 우리를 해방시켜주지는 못합니다.

우울증은 좌절에 대한 병리학적 표현이고 인간적 유대의 결핍이 원인입니다

이것은 심근경색이 아니고 심리 경색입니다. 보통 소진증후군이라 부릅니다.

성과주의는 인간을 병들게 합니다.

산업사회는  그저 노동만 하는 착취당한 인간을 구하는 것이 목표였는 데 이제는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환상을 조작해서 무엇도 가능하지 않다는 냉소자를 양산합니다.  우울증은 아니어도 냉소증을 가진 병원사회를 만듭니다.

자아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소년의 단계에서 자유롭다는 느낌만을 강제하는 학업착취는 그렇기에 대항기제로서 학교폭력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3등급도 의대간다. 지금의 성서한까지 의대 갈 수 있다. 우선 이것부터 그만둡시다

물론 그러기위해서는  대학서열화를 줄여야 합니다. 이번 의대 증원의 기회를 창조적으로 활용해서 국립대의대 통합모집과 같은 대변환을 시도해보아야 합니다. 서울대와 경상대 제주대 의대라도 우선 통합모집을 하는 시도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이번 의대 증원은 증원안 확정이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작입니다.

국립중앙의료원과 지역의료원의 수평적 통합을 통한 공공의전원 설립. 국립대 수련의 지역순회 의무제, 그리고 더 나가서 국립대 의대 통합과 같은 발상의 전환이 없다면 입시계는 상상이상의 열탕이 될 것입니다. 너무 뜨거워집니다.

교육부의 기민하고 지혜로운 대응이 절실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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