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타고난 욕구이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자존감을 높이고,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젊은이들에게 다가온 세상 없음, 무세계성

'Worldlessness'는  세상이나 현실과의 접점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 개념이 정치철학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은 한나 아렌트 때문입니다.

아렌트는 1955년 정치 이론의 역사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현대의 세계 없는 성장, 우리 사이의 모든 것의 고사 ㅡ 그리고  사막의 확산" 을 지적했습니다. 지금 여기의 모습입니다. 지향없는 혐오는 생각없음이 아니라 세계없음 때문입니다

우석훈 박사와 함께 88만원의 세대를 써서 알려진 박권일 작가는 한국인의 능력주의라는 책을 통해서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 청년의 정서를 알렸습니다.  박권일은 22년 겨울에 나온 이 책에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는 계기가 된 사건으로  최순실의 딸, 정유라 씨의 이화여대 부정(불공정) 입학, 그리고 그의 말 “부모 잘 만난 것도 능력”이라는 한마디에서 시작한 분노가 갖고 있는 무세계성 무공동체성을 찾아낸 듯 합니다. 사실 거창한 구호 같아보입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

이 구호는 사실 원자화된 개인을 현혹하는 레토릭입니다,
그렇기에 그 뒤의 조국 장관과 관련된 논란, LH 공사의 땅 투기 그리고 전혀 맥락이 달라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이유로  ‘시험’ 없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이 되는데에도 뜨거운 반대를 불러온 것입니다.

소위 인국공(인천국제공항) 정규직화 반대의 수준을 보여주는 가볍지만 위험스러운 표현이 공항 알바생이 공기업 정규직화된다는 것입니다.

​아렌트의 강연처럼 원자화된 사회에서 정치생활은 없습니다. 정치생활이 없는 무세계성을 가진 개인에게는 양진영의 부패만이 보이고 모든 것은 불신의 대상입니다.

아렌트는 자본주의가 성장하기 전에서 Worldlessness 라는 표현을 썼으니 그 때의 개념과 지금의 적용은 다를 것입니다.

한국이나 미국 그리고 이민자 문제로 극우정당을 낳은 유럽에서의 오늘날 의미로 무세계성 (Worldlessness) 은90년대말의 세계화의 반작용이자 사실은 결과물입니다.

​트럼프는 이 무세계성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90년대 이후 급진적 세계주의로 더 업그레이드된 자본주의는 보편적으로 양극화를 가져왔습니다. 88만원세대는 2007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세계화된 자본주의는 취업경쟁의 고도화를 가져왔고 취업함은 인간됨을 증명하는 것이기에 취업하지 못함은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잉여가 됨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뿌리를 잃은 청년이 양산됩니다. 유럽에서 혐오의 정치를  불러오게한 난민이 글로벌 양극화의 국제적 산물이라면, 잉여는 사회적 양극화의 국내적 산물입니다.  surplus 잉여는 물리학의 개념이었다가 이윤을 그럴듯하게 표현하는 경제학의 개념이 되었지만 지금은 불필요함, 혹은 불필요한 존재가 된 것에 대한 절망의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잉여 존재는 주변부로 '제외'되고 '배제' 됩니다. 그렇게 해서 말과 행위를 통해 참여할 수 있는 세계를 상실한 사람들이 됩니다.

​잉여 존재를 표현하는  '프레카리아트'가 '위태로운'과 '프롤레타리아트'의 합성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잉여 존재가 직면한 진정한 위태로움은 경제적 궁핍뿐만 아니라 공동 세계를 상실한 '무세계성(Worldlessness) 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새로운 세계에 참여합니다. 일베이거나 펨코이거나인 것이죠

20대와 50대 60대의 차이를 제가 시대와 매체를 통해 살펴보면 잉여화가 된 50대는 나는 자연인이다가 되어서 산으로 갑니다. 평균수명이 엄청나게 확대되기 전인 70대 중반정도가 평균수명인던 시절에 정상적으로 50대 후반에 잉여가 된 경우는 취미활동 명상등의 내면세계의 몰입이었습니다 

잉여가 세계와 연결없는 무세계성의 결과이지만 잉여화에 대한 대응이 공격적이거나 집단화되지 않았습니다.

박권일은 활성이대남이라는 표현을 쓰는 데 ‘활성 이대남’은 활성비타민과 달리 혐오의 확산, 민주주의의 파괴를 가져옵니다. 그런데 더 나쁜 적은 활성이대남을 이용하는 보수언론과 정치권의 야합인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보수언론이나 친일과 군인 그리고 자본의 결합을 뿌리로 둔 보수정당이 민주주의의 성숙을 싫어하는 것은 생존적 문제일 것입니다.

그 때는 윤석열이 그리고 지금은 이준석이 청년세대의 목소리를 듣겠다고 말할때는 여성을 포함한 청년의 목소리가 아니라 ‘안티 페미니즘’을 외치는 일부 남성의 주장들입니다.

어제 대통령실은  여가부 장관 공석에 대해  "법 개정 이전이라도 공약 이행에 대한 행정부 차원의 확고한 의지 표명이 필요하다는 게 윤석열 대통령의 생각"이라고 전하면서 여가부 폐지를 골자로 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야당의 반대로 지금까지 관철되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세계 어디나 활성이대남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파이낸셜 타임즈의 보도처럼 한국의 젊은 남성들의 보수화는 다른 나라보다 더 급격하고 남녀 정치성향의 양극단화는 가장 두드러졌습니다

정치권과 언론의 역할이 있고 없고의 차이라 보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1955년  “전체주의는 외로워진 대중의 지지로 유지된다.”라고 표현했는 데 외로워짐이라는 가해자 없는 개인화된 개념은 정확하게 이 현상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세계 없음, 무세계성은 자본주의 세계화의 결과입니다. 외로움이 아니고 밀려난 청년, 잉여화된 청년은 역설적으로 그런 상황을 만든 원인제공자를 지지하는 역설을 보입니다.

파편화된 피해자들이 공감능력이 없게 된다면(정확하게는 없게 만들어진다면) 연대대신 공격 비난에 열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진영을 넘나들면서 가치없는 방향없는 열광과 분노를 표출합니다.

이것은 갈라치기가 선거에서 표 장사가 된다고 생각하는 집단들의 기획 때문인 것입니다.    씽크탱크인 랜드(RAND) 연구소의 한국정책위원장인 에릭 모브랜드는 우리 대선이 끝난 직후  “언론이 한국의 선거에서 놓칠 수도 있는 것(What the Media Might Have Missed About South Korea's Elections)” 기고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3월 9일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는 윤석열 씨가 반페미니스트를 동원한 혐오 전략으로 최고위직에 오르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사회적 분열을 반영한 선거가 아니라, 정치인들이 선거 전략의 일환으로 사회를 분열시켰다. 사회적 분열을 선거 전략으로 바꾸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꼭 필요하고 어려운 젠더에 대한 대화를 효과적으로 왜곡할 것이다."
모브랜드는  “주요 인물이 미디어에 의존하여 주변적인 견해를 증폭시키고 분열을 조장하는 이러한 정치 방식은 서구의 관찰자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라는 내용을 썼는 데 서구의 익숙한 사람은 미국의 여성들과 전면전을 벌였던 도널드 트럼프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작권자 © 괜찮은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