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은 인간을 지배하는 말과 행동 그리고 그런 일련의 과정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업을 지으면 과보가 오기 마련입니다.

부모가 의도적 행위로 막 야단을 쳤는 데 이 때 자식이 자식이 "나 잘 되라고 하는구나"로 받아들이면 업을 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나한테 왜 그래"라고 안 좋게 생각하고 일종의 반항을 하면 그대로 화를 입는 과보로 나오게 됩니다.

자녀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의도적 행위, 이런 선업을 지으면 자식도 잘 되는 좋은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정과 존중을 안 한다. 자꾸 인정 안 하고  의심하면 업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들의 마음은 나도 그 때는 그렇게 잘 못했으니 그래서 내가 잘 못한 일이 자식에게 또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선한 마음. 그래서 그런 선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한 동기가 마음속에 있다고 해도 실제 행동은 화나는 마음에 기초하고 있으니 의도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내가 의도를 갖고 시간과 장소 상황을 딱 정해서 하면 자녀도 순순하게 받아들입니다. 때와 장소가 중요한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그냥 왜 화를 내는 거야 라는 반응이 자녀에게서 혹은 배우자에게서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 내 화의 뿌리에 관해서 탐구를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화가 날 만 했지요! 그런 상황이거나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상황과 결과의 인과관계가 부족한데 이를 연결시켜서 말을 하게 되니 구화지문(口禍之門- 말을 함부로 하면 화를 입게 되는 일) 이 일어납니다.

내게 화(禍)를 불러오는 화를 왜 낼까를 돌아보면 대체로 2가지입니다.

첫째로, 내가 화를 잘 내는 성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장과정이나 경험때문입니다.

두번째로는 반응이 있어서였습니다. 

대체로 화를 내면 가족이면 맞춰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과정이 축적되면 내가 화를 내면 일이 잘 풀리고 원하는 결과를 얻을수 있다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착각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고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선생님이라고 하는 데 직업으로서의 선생님이 아닌 실제 선생님은 아주 적은 숫자에 불과합니다.

교육학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만한 사람인 페스탈로치는 나이에 관계없이 존중을 통한 인격의 대우와 도야을 목표로 실천한 분입니다. 페스탈로치 이전의 교육관이 복종을 교육의 원리로 삼았는 데 지금은 이것을 야만적인 교육관이라 평가합니다. 야만적 교육을 극복할려면 아동이 아니라 교육자가 훈련을 거쳐야 합니다.

요컨대 부모는 실천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거쳐서 고친 것이지 애초에 훈련받지 않은 양육자이고 교육자이니 본래의 기질을 체계적으로 억제하고 지도하는 방식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사실은 대부분의 부모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은 화를 내는 것이고 두번째로 쉬운 일은 자극을 안 주고 스스로 고쳐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 벌컥 화는 낼지라도 내가 잘했다고 우기지는 않는 경우입니다.

법륜스님은 늘 알아차림을 강조합니다. 아 내가 성질이 날려고 하는 구나 그런 알아차림, 자각을 하면 그 성질에 반응하지 않는 수련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성질이 나면  사과를 하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할 경우에는 (이것은 어느 시기에 어떻게 하겠다고 계획을 세우는 것) 상대방도 받아들임의 폭이 커집니다.

방임을 하지 않되 계획을 갖고 지도를 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계획 없는 화를 낼거면 그냥 자식이 스스로 고쳐지기를 기다리는 것만도 못합니다.

교육학에서 시조가 루소와 페스탈로치입니다. 페스탈로치가 루소의 영향을 받아서 실천한 사람입니다.  페스탈로치는 1746년생 루소는 1712년생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교육사상입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성장과정에서의 큰 차이로 인해 인간에 대한 정의나 교육방식이 다릅니다.

  루소는  사실 자기자식도 제대로 돌 보지 못한 사람이지만 아동이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활동하게 해야 한다는 체험학습위주의 방임적 교육관입니다.

반면  페스탈로치는 아동을 근본적으로 선하다고 보는 루소와는 달리 아동을 선도 악도 아닌 ‘중간적 존재’로 보는 관점입니다. 보다 현실적인 것 같기도 하고 이런 개념때문에  아동이 처한 환경이 중요한 것이 됩니다. 그가 가진 잠재적 능력과 소질을 발견해  조화롭게 발전시키는 것이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루소의 교육관이  ‘소극적 교육’이라고 하는 반면  페스탈로치의 교육관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입니다. 물론 그의 방식이 주관적 감정에 빠져있고 논리적이지 못 하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러나 둘 다 자기주도성을 강조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개인이 자신을 개선하고 자율적 학습을 하게 되면 사회발전도 가능하다고 하는 루소의 자연주의 교육사상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또한 지식을 주입시키는 교육이 아니라  선천적인 소질을 계발하는 교육의 관점입니다.

  페스탈로치의 관점에서 교육은 자기개혁이고 자기완성입니다. 이런 자기개혁과 자기완성이 있어야 좋은 사회가 만들어집니다.  사실 루소의 말처럼 사회가 타락한 곳이어서  아동을 타락한 사회로부터 격리해 자연성을 잘 보존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은 조금 어리둥절한 말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동은 격리되어야 하기에 사회적 인간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루소는 철학자이지만 페스탈로치는 교육사상가이면서 교육실천가, 교육행정가라는 위상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루소가 아버지의 교육적 역할을 조금 더 강조한 반면 페스탈로치는 교사로서의 어머니 역할을 강조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자녀의 환경을 결정하는 것이야 어머니의 역할이 더 클 수 밖에 없는 지금의 현실을 일찍 통찰한 것이겠죠

사실 대부분의 엄마들이 자신이 양육자일지는 몰라도 교육자의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하고 엄마가 된 것입니다.

페스탈로치는 가정의 단란함이 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기쁨이라 했고  자녀를 보는 즐거움은 사람의 가장 거룩한 즐거움이다라 했습니다.                  

잠시 입시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 거룩한 시간을 낭비하지 마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동상은 스위스 취리히에 있습니다.
이 동상은 스위스 취리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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