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글로벌 1위 영화 황야
넷플릭스 글로벌 1위 영화 황야

넷플릭스 황야에 국내 네티즌은 혹평, 외국 팬들은 열광하고 있습니다. 잘 하면 제 2의 오징어게임이 될 수도 있겠는데 드라마가 아니라 영화로 K컬처가 글로벌 1위를 기록한 건 작년 연상호감독의 정이 이후 두 번째입니다. 잠시 1위에 머물다가 바로 꼬꾸라진 정이와 달리 마동석의 황야는 장기집권에 들어갈 태세입니다. 주가는 연일 오르고 시청자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는 넷플릭스는 확실하게 압도적 1위를 지킬 수 있는 길이 K콘텐츠에 있음을 잘 알고 있죠. K는 킬러의 줄임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국내 팬들이 혹평을 하는 이유는 영화의 기대치가 높아서입니다. 마동석 특유의 액션 코미디는 범죄도시 급 그리고 묵직한 주제의식과 폐허 속의 인간 심리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떠올려서 동시에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시간 때우기 액션 영화로 본다면 이 만한 작품이 없습니다. 그리고 팬들은 감독이 입뽕작으로 무술 감독 출신인 점을 약점으로 지적해 서사가 약하고 세계관은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그대로 따왔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액션이 시원시원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면서 세계관도 차별되고 서사의 힘도 느껴지면 정말 좋은 영화지요. 그런 영화가 어디 흔하겠습니까? 저는 이 영화를 볼 때 마침 읽은 책이 서울대 철학과 김기현 교수의 신작 인간다움이어서 두 이질적인 작품을 섞어서 리뷰해보면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무엇이 인간다움인지를 진지하게 묻는 이 책에서는 세 키워드를 순차적으로 제시합니다. 바로 공감, 이성, 자유입니다. 이 세 키워드는 인간 고유의 특성들이죠. 그런데 종말 즉 아포칼리프스를 맞은 인간에게도 이 세 가지가 있을까요? 영화를 보며 하나하나 따져보죠.

서울대 철학과 김기현 교수의 '인간다움'
서울대 철학과 김기현 교수의 '인간다움'

 

1) 대지진이 일어나 전세계 문명이 완전 붕괴하면 공감이 인류에게 남아 있을까?

영화에서는 아마 강도 10 이상의 초거대 지진이 전 세계에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을 그립니다. 확률적으로 조 분의 1 정도 되지 않을까요? 그런 낮은 가능성을 영화니까 다루기는 하지만 영화는 결국 집단 심리의 투영입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도 썼듯이 대한민국 국민들 중에 상당수는 이 세상이 망해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고 이를 대리만족시켜주는 게 영화죠.

영화 속에 놀라운 사실은 모든 게 다 끊긴 상황, 호모 사피엔스가 겪은 최대 위기 속에서 3년이 지났는데도 사람들은 공감이 여전히 넘친다는 점입니다. 정의와 유머의 화신 마동석뿐 아니라 전기도 없어 고기를 날로 뜯어 먹어야 하는 생존자들도 서로에게 강한 공감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공감 능력은 호모 사피엔스의 본성이 맞을 듯합니다. 김기현 교수의 이 주장은 영화에서 증명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고통받는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배웠는데, 배운 데로 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편함이 아니다. 고통받는 타인을 보면서 느끼는 우리의 감정은 그것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원초적이다. 상대방의 고통이 나의 고통처럼 즉각적으로 전해져오는 것이다.”

2) 악어를 사냥하는 마동석, 생존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는 인간에게 이성은?

이성이 김기현 교수가 제시하는 인간다움의 두 번째 키워드입니다. 김기현 교수는 인간에게 이성은 자신감이라고 말합니다. 혼란 속에서 밀려 오는 두려움과 불안함은 이성으로 통제돼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어 왔다는 거죠. 그런데 그 이성을 위축시킨 철학자가 바로 히틀러의 정신적 스승 니체입니다. 김기현 교수는 죽은 니체를 히틀러의 궁정 철학자로 만든 이로 여동생 엘리자베스(절반은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니체 철학에는 분명 여동생을 거치지 않고 히틀러를 다이렉트로 매혹시킬 충분한 공통 분모가 있습니다. 그는 반유대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반유대주의의 대부 바그너와 절친이었던 것은 사실이죠.)라고 말하지만 니체의 주 공격 대상이 이성인 건 맞습니다. 19세기말과 어울려 대혼돈과 대공포를 몰고 온 장본인이 맞죠.

황야의 감독이 니체든 누구든 철학적으로 인용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지만 혼돈 속에 극도의 공포에 빠져 있는 인간들이 끝까지 이성을 잃지 않는 것은 이 영화가 다른 어포칼리프스 영화와 차별화되는 지점입니다. 물론 빌런인 의사 양기수는 이성을 잃은 거의 유일한 인물이지만 그의 이성은 딸에 대한 맹목적 사랑 때문이지 생존본능 때문이 아닙니다. 원래 역사적으로는 인간은 굶주리면 무슨 일이든 하는 존재가 맞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목적이면 인간의 뇌는 전전두엽은 잠자고 두뇌 깊숙이 번연게가 작동합니다. 불안과 공포는 편도체를 자극해 인간을 동물로 만드는 데 그러면 이성은 사라져야 마땅하죠. 도파민이 아니라 노르에피네프린이 폭발하면서 거친 폭력성이 드러나죠. 그런데 마동석의 유머와 정의구현 차원의 폭력은 인간의 이성을 살려냅니다. 인간의 문명이 거의 완벽히 파괴된 후에도 이성이 여전히 인간다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은 황야의 감독이 의도하지 않게 영화를 통해 보여준 메시지입니다.

3)인간을 파충류처럼 재생이 가능한 존재로 만들면 인간은 자유로울까?

사실 인간다움의 세 번째 키워드가 자유가 된 것은 조금 의아합니다. 김 교수의 말 대로 자유의 핵심은 외부의 간섭 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인데, 이게 가능할 수 있겠는가 특히 인류 문명이 종말을 구한 이후에 살아남기 위헤서 동물을 직접 사냥해야 하는 인류에게 무슨 자유가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죠. 인간이 자유롭다는 건 선택을 전제해야 하는데 그 선택이라는 게 돈이 있을 때나 가능하지 돈이 없을 때는 사실상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황야는 두 가지 면에서 자유를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일단 돈이 사라진 세상에서는 오직 물물교환만이 남습니다. 힘 센 마동석은 멧돼지나 악어를 사냥하고 그 고기와 필요한 걸 현물로 받습니다. 물물교환은 돈이라는 매개체를 거치는 경제시스템보다 좀 더 자유로울까요? 영화 속의 대표적인 물물교환은 각자 잘 하는 것, 예를 들어 여주인공은 그림을 잘 그려 그림과 마동석이 사냥한 고기를 바꾸죠. 각자 잘 하는 것 기존에 가진 것을 필요로 한 것(대부분 식량)과 바꾸는 시스템에서는 선택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선택이 없는 상황은 사실상 자유롭지가 않죠. 자연상태에서 자유로운데 교육과 문명 때문에 자유를 잃었다는 루소의 주장은 황야 같은 상황을 자연상태로 사고 실험해보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자유를 생각해 볼 게기는 양기수 박사가 인류를 진화시켜. 덜 먹고도 생존할 수 있고 머리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자체적으로 재생하는 파충류 인간을 만드는 시도입니다. 그 실험을 위해 수많은 희생양들이 등장하죠. 결국 양기수 박사는 생존을 위해 먹어야 살 수 있는 인류에게 좀 더 자유를 주고자 노력했던 결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실험은 실패하고 양기수 박사는 응징되지만 인간은 생존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김기현 교수의 철학서에는 인공지능과 챗 GPT 이야기는 나오는데 경재라 불리는 생존을 위한 모든 활동 속에서도 인간다움이 자유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습니다.

인간다움에 공감과 이성은 황야를 보면 자연스럽게 납득이 되는데 자유가 꼭 포함되어야 하는지는 다소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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