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ㅏ살인자 0 난감
넷플릭스 드라마 ㅏ살인자 0 난감

넷플릭스 드라마 중에서 시작부터 끝까지 한 큐에 본 작품은 지금까지 4편이 있었습니다. 오징어 게임, 지옥, 더 글로리, 그리고 살인자 O 난감, 경성크리처로 넷플릭스의 혁신동력이 떨어진 것 아닌가하는 걱정을 잠재운 수작이 바로 살인자입니다. 원작 웹툰에 감독의 연출력도 아주 볼만한 작품이었죠. 다만 이 드라마가 특정 정치인을 연상시키는 배역으로 일부 진영에서는 안 보기 운동까지 일었던 점은 조금 아쉽습니다, 그런 논리라면 대한민국 재벌들의 비도덕성이나 일제 강점기의 일본의 만행을 노골적으로 다룬 드라마들에도 똑 같이 대기업의 시청반대운동, 일본의 시청반대 운동이 있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었죠. 드라마는 드라마로 봐야 합니다.

이 드라마는 한국인들이 열광하는 복수와 정의 구현의 심리와 인간의 타고난 공격성의 본능을 엮은 우수한 범죄물입니다. 원조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온 더티 해리시리즈가 되겠죠. 범죄자가 자꾸 풀려나오니 형사가 자경단이 되어 스스로 법을 집행하는 이 드라마는 고전 중의 고전이죠. 살인자 O 난감은 한국의 더티 하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시리즈 2가 제작이 확정적인 것으로 앞으로 선석구와 최우식 콤비의 시리즈물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 드라마의 철학적 쟁점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죽어 마땅한 사람이 있을까?

모든 드라마에 철학이 있다면 당연히 그 철학이 깔고 있는 전제가 있을 겁니다. 이 드라마의 전제는 이겁니다. “죽어 마땅한 사람은 있다.”

정의란 단어는 서양에서 아리스토렐레스가 동양에서는 공자님이 저작권을 갖고 있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모든 사람에게 자신에게 속한 것을 주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죠. 죽어 마땅한 자는 대부분 폭력을 누군가에게 행사한 사람으로 그 자신이 폭력에 속한 사람입니다. 당연히 누군가를 폭력으로 죽게 했다면 그 사람도 폭력 속에서 죽어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정의죠. 공자님의 정의는 어떨까요? 공자님의 정의는 사회적 관념입니다. 그 사회에 인과 예기 지배관념으로 자리받고 각 사회 구성원이 조화로울 때 정의로운 사회가 되는 거죠.

두 사람의 관점메서 이 드라마의 전제 죽어 마땅한 사람이 있다를 톺아 보죠.

죽어 마땅한 사람은 죄 지은 사람입니다. 죄가 속한 곳은 세트로 움직이는 벌의 세계입니다. 죄가 벌에 가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덕을 중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럽죠. 죽어 마땅한 사람은 그 사회 전체가 허락한 수준 이상의 죄를 저질렀을 때 벌을 주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 벌을 주는 주체가 개인이어야 한다는 주장에까지 동조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면 사회라는 것이 성립할 수 없게 되죠. 반면 공자님은 본인이 이미 살인을 저지른 적이 있고 스스로 도척처럼 죽어 마땅한 이가 있다고 말한 바로 보아 이 드라마에서 자행된 정의의 이름의 사적 처벌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한비자가 나와 국가가 정한 법의 이름으로 폭력에 대한 처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전 제자백가 시대까지 실제 정의는 개인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회와 국가가 확실하게 자리 잡은 현대로 접어들어서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 있다는 견해에 대해서 입장이 문화에 따라 다릅니다. 사형제가 있는 나라는 있다고 보는 나라고 사형제가 없는 나라는 없다고 보는 게 맞죠. 유교를 제외한 불교 그리고 기독교는 죽어 마땅한 사람은 없다고 결론내릴 겁니다. 불교는 인과응보, 기독교는 신의 심판에 맡기는 게 맞다고 하겠죠.

이 드라마에서 노빈과 최우식 그리고 신들린 연기를 보여준 이희준은 그냥 각자 자신이 정한 기준에 따라 죽어 마땅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결정햅니다. 스스로 법 집행에 나섭니다. 이 전제는 다음과 같은 쟁점이 따라 나오죠.

정의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 수 있다

건강 보험을 심사하는 심평원 원장을 지낸 서울의대 출신 작가 김선민 씨는 자신의 책 ;아픈 의사, 다시 가운을 입다에서 레지던트 시절 목격했던 일을 증언합니다.

매 맞아 죽는 여성의 죽음이 등장합니다. 동거남의 폭력에 입원한 한 여성은 오래 앓다 죽었습니다. 그 죽음의 원인은 복합적이겠지만 한 가지 김 작가에게 분명했던 것은 가해자가 분명 존재하는 죽음은 사인을 어떻게 적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죠. 심장마비가 아닌 폭력에 의한 외상을 사인으로 적을 때 경찰의 개입을 우려한 선배 의사 때문에 그녀는 큰 실망을 하고 의사라는 직업 자체에 본질적 회의를 느끼죠.

사실 그녀의 동거남은 의사의 사망진단서에 따라서 살인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결국 살인자를 면하죠. 이런 인간들을 찾아서 복수를 대행해주는 게 이희준과 최우식 그리고 노빈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명제에 적극 공감하겠죠. 정의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바로 정의가 객관적인 개념인지 주관적인 개념인지에 대한 논쟁입니다. 객관적이라면 사회가 법과 제도를 통해 정의를 구현할 수 있지만 후자라면 애매해집니다. 증거가 없다면 대부분의 범죄는 실제 그 범죄를 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면죄부를 받습니다. 정의를 주관적으로 보는 이들은 정의의 애매한 속섬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예외에 대해서 무차별적으로 응징을 하면서 자신들의 범죄를 합리화합니다. 이런 드라마 이런 영화가 계속 나오고 사람들은 열광합니다. 많은 이들이 정의가 주관적이며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 수 있다는 주장에 공감한다는 뜻이죠. 그렇게 되면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국가가 개인의 폭력적 복수를 허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미국의 법 체계는 우리보다 더 듬성듬성하죠. 특히 돈의 개입이 우리보다 더 크기 때문에 미국의 법체계는 사실상 유전무죄 무전유죄입니다. 특히 살인자 0 난감 같은 경우는 유전무죄를 국가라는 제도의 한계로 보고 벌의 주체가 국가와 사법체계 대신 자경단이 되는 상황이죠.

일단 피해자와 그 가족 그리고 지켜보는 다수의 만족감을 올라갈 것입니다. 죄값을 치르기를 원하는데 그걸 법이 완전하게 이루지 못하니 우리는 살인자 0 난감 같은 드라마에 열광하는 것이죠. 불만을 만족감으로 바꿀 수 있고 범죄 예방 효과도 사법제도보다 클 수도 있습니다. 그런 면제서 살인자는 남감하는 게 아니라 흥분하는 거죠.

그런데 문제도 크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그 사회는 끝없는 폭력의 연속 속에서 무법천지가 될 수 있습니다. 80년대 에스코바르가 콜롬비아를 무법천지로 만들어 범죄로 인한 사망률을 미국의 3배까지 높인 그런 상황이 재현될 수 있습니다, 이 드라마가, 보는 사람의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을 동시에 증가시킬 수는 있겠지만 동시에 폭력의 무작위성에 의해 누구든 자신이 저지른 죄보다 더 큰 벌을 받을 수 있는 공포 또한 사회 구성원 전부의 편도체에 자리잡을 겁니다. 결국 국민 모두가 난감해지는 거죠.

살인자 O 난감의 철학적 베이시스는 미국의 법철학자 데이비드 스미스입니다. 스미스는 특정한 상황에서 개인의 사적 복수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법적 제도가 피해자에게 충분한 보상을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 사적 복수가 허용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적 복수를 허용하는 것이 피해자에게 정신적 치유를 제공하고 범죄 예방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웹툰과 드라마의 세계관을 완벽히 대변하고 있죠.

그렇지만 이런 반론도 가능합니다.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으면서 누구든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맥락에 대한 이해가 법정에서 이루어지기도 하고 무시되기도 합니다. 그 애매함을 어쩌면 수능의 정답처럼 짜릿한 사적 복수로 통쾌하게 갚으면 정의는 실현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을 하는 게 이 작품이죠. 악인과 선인의 경계, 악행과 선행의 경계가 선명할 때와 선명하지 않을 때를 인간은 동시에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즉 인간은 누구나 피해자와 가해자가 될 수 있기에 법은 사적 복수를 막아야 합니다. 시적 복수는 필연적으로 그 사회의 폭력의 발생 빈도를 대폭으로 증가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애매함(이 드라마는 극적인 재미를 위해 그 애매함을 없앴죠.)을 인정하고 모든 폭력에 일괄적으로 정의를 개입시키지 않고 때로는 애매람 자체를 인정할 수 있어야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여하튼 폭력과 복수 그리고 죄와 벌, 사법적 정의와 사적 정의라는 점에서 재미 못지않게 생각 거리를 주는 드라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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